서울 종로의 청계천 옆 서린빌딩. 겉보기에는 여느 대기업 본사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이 건물은 오랫동안 SK그룹의 권력과 전략, 그리고 미래가 교차하는 장소였다. 최태원 회장의 집무실이 있고, 그룹 전략을 총괄하는 SK수펙스추구협의회가 자리한다. 한국 재계에서 본사는 단순한 부동산이 아니다. 그것은 기업의 정신 구조를 보여주는 좌표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SK하이닉스의 서린빌딩 입주 검토는 단순한 공간 재배치 이상의 함의를 갖는다. 이것은 사실상 선언이다. SK그룹의 중심축이 에너지와 통신에서 AI 반도체로 이동하고 있다는 선언 말이다.
기업은 늘 미래 산업이 있는 곳으로 권력을 이동시킨다. 미국 자동차 산업이 디트로이트를 만들었듯, 실리콘밸리는 반도체와 소프트웨어가 자본주의의 새로운 심장이 되었음을 보여줬다. 일본의 전후 산업사는 제조업 본사가 어디에 자리 잡는가에 따라 국가 전략이 달라졌음을 보여준다. 한국 대기업 역시 예외가 아니다. 본사 가까이에 배치된 사업은 곧 그룹의 미래다.
10년 전만 해도 SK의 상징은 정유와 통신이었다. 정유사업은 그룹의 현금창출 엔진이었고, SK텔레콤은 한국 정보통신 산업의 지배적 사업자였다. 그러나 지금 시장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AI가 산업 질서를 재편하면서 반도체는 더 이상 하나의 사업부가 아니라 국가 경쟁력 자체가 되고 있다.
특히 생성형 AI는 메모리 산업의 위상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 과거 메모리는 범용 제품이었다. 공급이 늘면 가격이 떨어지고, 경기 사이클에 따라 기업 가치가 출렁였다. 그러나 AI 시대의 메모리는 다르다. HBM(고대역폭메모리)은 이제 AI 인프라의 핵심 부품이 됐다. AI 모델이 거대해질수록 GPU와 메모리 간 데이터 병목현상은 더 심해지고, 이를 해결할 수 있는 기업은 극소수다.
지금 NVIDIA가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기업 가운데 하나가 된 이유도 결국 메모리 때문이다. AI는 연산의 산업인 동시에 메모리의 산업이다. 그리고 이 시장에서 SK하이닉스는 단순한 추격자가 아니라 선도 기업 가운데 하나로 올라섰다.
최태원 회장은 이를 누구보다 빨리 읽은 경영자다.
흥미로운 점은 그의 변신이다. 오랫동안 그는 한국 재계에서 다소 이질적인 인물로 여겨졌다. 다른 총수들이 수익성과 시장점유율을 말할 때 그는 사회적 가치(SV)와 ESG, 행복경영을 이야기했다. 많은 재계 인사들은 이를 이상주의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보면 최 회장은 단순히 ‘착한 경영’을 말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질서 자체가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읽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오늘날 AI 전략 역시 같은 연장선 위에 있다.
많은 이들은 최 회장이 ESG에서 AI로 급선회했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정반대다. AI 경쟁력을 확보하지 못하면 기업의 지속가능성 자체가 사라진다는 현실을 받아들인 것이다. ESG도, 사회적 가치도 결국 생존 가능한 기업 위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이는 SK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세계 기업들은 모두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Microsoft)는 더 이상 단순한 소프트웨어 회사가 아니다. 사티아 나델라는 회사를 AI 운영체제로 바꾸고 있다. 오픈AI에 대한 대규모 투자 이후 마이크로소프트 내부의 핵심 원칙은 단순하다. “모든 제품에 AI를 넣는다.”
구글(Google) 역시 마찬가지다. 검색 제국이었던 구글은 생성형 AI 충격 이후 회사 구조를 사실상 전면 재편 중이다. 공동창업자 세르게이 브린(Sergey Brin)이 다시 AI 프로젝트를 챙기기 시작한 것은 상징적 장면이다. 검색 시장 지배력조차 AI 앞에서는 영원하지 않다는 위기감 때문이다.
메타(Meta)의 마크 쥬크버그는 메타버스 실패 이후 다시 AI로 방향을 틀었다. 그는 최근 “AI가 메타의 중심”이라고 선언했다. 한때 소셜미디어 회사였던 메타는 이제 AI 인프라 기업으로 변신하려 하고 있다.
일본에서도 비슷한 움직임이 나타난다. 소프트뱅크 손정의 회장은 ARM을 중심으로 다시 AI 반도체 전쟁에 뛰어들고 있다. 한때 비전펀드 실패로 조롱받았지만, 그는 최근 “인류 초지능 시대”를 반복해서 언급하며 AI 투자 확대를 선언했다.
세계 기업들이 공통적으로 이해한 것이 있다.
AI는 하나의 산업이 아니라 산업 위에 올라가는 새로운 운영체계라는 사실이다.
19세기 철도가 그랬고, 20세기 전기가 그랬다. AI는 21세기의 기반 인프라다. 문제는 이런 전환기에는 늘 승자독식 구조가 나타난다는 점이다. 산업혁명기 영국이 그랬고, 인터넷 시대 미국 빅테크가 그랬다. AI 역시 소수 기업이 시장을 장악할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지금 기업들은 점점 더 단순한 질문 앞에 놓이고 있다.
AI OR DIE.
AI 중심 기업으로 변신하지 못하면 도태될 가능성이 커진다는 것이다.
최태원 회장이 SK하이닉스를 서린빌딩 가까이 두려는 것도 결국 같은 맥락이다. AI 시대 경쟁력은 속도에서 나온다. 과거처럼 연말 전략회의와 다단계 보고 체계로는 시장 변화를 따라갈 수 없다. 엔비디아 같은 고객사의 요구는 실시간으로 변하고, AI 산업의 기술 사이클은 몇 달 단위로 움직인다. 회장과 전략 조직, 반도체 사업 조직이 한 공간 안에서 움직일 때 의사결정 속도는 달라진다.
물론 위험도 있다.
AI 거품론은 여전히 존재한다. 닷컴버블 당시에도 “인터넷이 세상을 바꾼다”는 말은 맞았지만, 수많은 기업이 사라졌다. AI 역시 같은 길을 걸을 가능성이 있다. 과잉 투자와 기술 과열, 지정학적 규제는 언제든 시장을 흔들 수 있다.
반도체 산업 자체도 냉혹하다. 오늘의 승자가 내일의 승자라는 보장은 없다. 메모리는 특히 경기 민감 산업이다. 미국의 대중국 반도체 규제, 글로벌 경기 둔화, 전력 비용 상승 같은 변수도 존재한다.
그러나 더 위험한 것은 변화하지 않는 것이다.
Nokia는 스마트폰 시대를 읽지 못했고, BlackBerry는 모바일 혁명을 과소평가했다. 일본 전자기업들 역시 디지털 전환 속도를 놓치며 쇠락했다. 산업사에서 가장 위험한 기업은 실패한 기업이 아니라, 과거 성공 방식에 안주한 기업이었다.
최태원 회장은 지금 그것을 피하려 하고 있다.
서린빌딩으로 향하는 SK하이닉스의 움직임은 단순한 입주 계획이 아니다. 그것은 SK그룹이 스스로를 AI 기업으로 다시 정의하기 시작했다는 상징적 사건이다.
아마 훗날 한국 산업사를 돌아보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SK가 진짜로 변하기 시작한 순간은, 반도체 조직이 서린빌딩으로 들어오던 때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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