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자형' 경제 분화 가속···AI 호황과 호르무즈 충격, 아시아 명암 갈랐다

  • 반도체 강국 한국·대만 사상 최고치 행진 vs 제조업 신흥국 유가 직격탄

그래픽 송지윤 디자이너
그래픽 AJP 송지윤 디자이너
 
인공지능(AI) 호황과 호르무즈 해협 봉쇄가 아시아 경제 지형을 뚜렷한 'K자형'으로 갈라놓고 있다. 반도체 기반의 한국·대만이 사상 최대 랠리를 이어가는 사이, 제조업 비중이 높은 인도·태국·필리핀 등은 사상 초유의 유가 충격에 신음하고 있다.

AI 붐이 가져온 과실과 연료 부족이 만든 고통이 동일 권역에서 정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이른바 '아시아판 K자 회복'이 현실화하고 있다는 것이 경제학자들의 진단이다. 미국·이스라엘과 이란의 전쟁 장기화로 호르무즈 해협이 사실상 완전 폐쇄 상태에 들어가면서 두 곡선의 격차는 갈수록 가팔라지는 양상이다.

위쪽 곡선의 주인공은 단연 반도체 강국들이다. 대만의 1분기 국내총생산(GDP)은 13.69% 성장하며 39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대만 증시는 캐나다 증시를 제치고 세계 6위로 올라섰다. 한국 코스피도  이미 올해 80% 가까이 상승하며 전 세계 주요 지수 최고 성과를 기록 중이다. 한국은 영국을 제치고 세계 7위 주식시장(4조 400억 달러)에 올랐다. 올해 세계 10대 증시 가운데 6개가 아시아에 있다. 시장은 지정학보다 AI를 더 크게 보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1분기 영업이익이 사상 최대를 기록한 데 따른 것이다. 

삼성전자 시가총액은 1조 달러를 돌파했으며, 대만 TSMC는 단일 종목으로 대만 증시 시총의 40% 이상을 차지하게 됐다.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는 글로벌 AI 시장 규모가 2033년 4조8000억 달러로 2023년 대비 약 25배 커질 것으로 전망했다. 반도체 슈퍼 사이클이 단순한 경기 회복을 넘어 새 산업 패러다임으로 굳어지고 있다는 의미다.

그러나 아시아 남쪽과 서쪽의 풍경은 정반대다. 소비자물가지수(CPI) 바스켓의 36% 이상이 유류와 연계된 필리핀에서는 휘발유 가격이 ℓ당 100페소(약 5.81달러)를 넘어섰다. 필리핀 중앙은행은 물가를 누르기 위해 금리를 올릴지, 성장 방어를 위해 동결할지를 두고 진퇴양난에 빠졌다.
송지윤 그래픽 디자이너
그래픽 AJP 송지윤 디자이너
 
마닐라 당국은 연료 수요를 줄이기 위해 주 4일 근무제까지 도입했다. 태국은 전국적인 연료 부족 사태를 겪고 있고, 파키스탄 정부는 크리켓 팬들을 향해 "경기를 집에서 관람해 휘발유를 아껴 달라"고 호소했다. 평소 같으면 상상하기 어려운 행정 조치들이 잇따라 쏟아지는 까닭이다.

유엔개발계획(UNDP)은 이번 전쟁으로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약 880만 명이 빈곤 추락 위험에 놓였으며, 역내 GDP가 0.3~0.8%포인트 깎일 수 있다고 추산했다. 빈곤 라인 인근에 있던 가구들이 연료·식량 가격 급등에 그대로 노출되면서 사회 안전망까지 흔들리고 있다는 분석이다.

분화의 한복판에는 중질·중유 원유를 둘러싼 확보 경쟁이 자리하고 있다. 정제 마진이 가장 높고 중동 수출의 근간이 되는 유종이다. 미국이 세계 최대 산유국이긴 하지만 생산량 대부분이 경질 셰일유에 쏠려 있어, 아시아 정유사들은 호르무즈를 거치지 않는 비중동산 사워(고유황) 원유를 두고 치열한 입찰 경쟁을 벌이고 있다. 한국·중국·일본 등이 같은 물량을 놓고 부딪치는 구도가 굳어지면서 프리미엄도 가파르게 뛰는 추세다.

장태훈 에너지경제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선주와 보험사를 설득할 만큼 합리적이고 실효성 있는 조건으로 전쟁이 종결되지 않는 한, 장기적으로도 유가가 전쟁 이전 수준으로 회귀하기는 극히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전쟁이 장기화하면 중동 밖에서도 중유 확보 경쟁이 불가피하다. 중국과 일본 역시 같은 물량을 입찰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14일 기준 브렌트유는 배럴당 약 106달러 안팎에서 거래됐다. 호르무즈 해협 일일 통항 선박은 전쟁 이전 평균 135척에서 약 18척으로 급감했다. 세계은행은 3월 말 기준 브렌트유가 65% 가량 뛰어 월간 상승률 기준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고 발표했다.

AI 호황의 과실은 승자 그룹 내부에서도 고르게 퍼지지 않고 있다. 삼성전자 반도체(DS) 부문 노동조합 조합원 3만여 명은 임금 협상이 13일 결렬되면서 21일부터 6월 7일까지 파업에 돌입하기로 했다. 노조는 영업이익의 15%를 성과급으로 지급하고 기본급을 7% 인상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JP모건체이스는 18일간의 파업이 진행될 경우 삼성전자 분기 영업이익이 최대 12% 감소할 수 있다고 추정했다.

대만 사정도 다르지 않다. 반도체 산업이 전체 고용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4%에 불과하지만 신입 사원 연봉이 다른 업종의 5배에 이르면서 양극화와 경제력 집중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한 산업에 부와 인재가 빨려 들어가는 사이 전통 제조업과 서비스업의 임금 격차는 더 벌어지는 양상이다.

당국자와 시장 전문가들은 이 같은 격차가 아시아를 넘어 세계 경제에 충격을 줄 수 있다고 경고한다. 불평등 심화는 소비를 위축시키고 통화정책을 복잡하게 만들며 글로벌 무역 흐름을 흔들 수 있다는 것이다. 연료 부족은 머지않아 임계점에 다다를 수 있다는 진단도 나온다.
그래픽 송지윤 디자이너
그래픽 AJP 송지윤 디자이너
 
앤디 오브라이언 코노코필립스 최고재무책임자(CFO)는 1분기 실적 발표 콘퍼런스콜에서 "6~7월에 접어들면 수입 의존도가 높은 일부 국가가 심각한 물량 부족에 직면할 수 있다"고 말했다. 미국 정유사 발레로 에너지도 공급망 압박이 한층 심화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레인 릭스 발레로 CEO는 "호르무즈가 봉쇄돼 있는 하루마다 재고를 다시 채우는 데 최소 사흘이 더 걸린다"며 "재고를 완전히 복원하려면 6~12개월이 필요할 수 있다"고 밝혔다.

AI가 끌어올린 곡선의 위쪽과 유가가 짓누른 아래쪽이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그 시점은 결국 호르무즈 해협의 봉쇄 해제 여부에 달려 있다는 것이 시장의 공통된 인식이다. 한국 역시 반도체 슈퍼 사이클의 수혜와 에너지·석유화학 공급망 충격이라는 두 곡선을 동시에 끌어안고 있는 만큼, 어느 한쪽으로 균형이 기울 경우 그 파장은 다른 어떤 아시아 국가보다 직접적일 수밖에 없다는 관측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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