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철스님의 '가로세로'] 남들이 백 배로 하거든 너는 천 배 이상 노력해라

원철 스님
[원철 스님]

 
낮에 공식행사를 마치고 난 뒤 저녁의 개인적 모임시간까지 두어시간 여유가 생겼다. 틈새를 이용하여 어디를 들러볼까 하고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불현 듯 그 앞을 지나갈 때마다 ‘가봐야지!’ 하면서도 늘 그냥 지나쳤던 장소가 떠올랐다. 경주국립박물관이 보이는 지점에 있는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857~?)선생 사당이다. 한갓짐이 주는 여유가 무엇보다 좋았다. 5월의 신록이 싱그러운 오늘도 한산한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기울기가 만만찮은 수 십개의 계단 끝의 대문 앞에는 ‘방문을 환영한다’는 경주최씨 종친회 현수막이 펼쳐져 있다. 볼거리 많고 갈 곳 많은 경주에서 이렇게 소박한 사당을 찾아주는 일은 그 자체로 환영인사를 받을 만한 착한(?) 행동이라고나 할까. 추모문 상서장 영정각 유물관 관리동 비각 등 총 6채의 기와집으로 구성된 곳이다. 입구의 마당에는 시비(詩碑)와 유허비(遺墟碑) 그리고 고운대(孤雲臺) 바위가 언덕을 이루면서 길게 뻗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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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인왕동 상서장 현판. 사진, 필자제공]
 
중심건물은 상서장(上書莊)이다. 웃어른에게 글을 지어 올린 집이라는 의미였다. 대상은 진성(眞聖 865~898)여왕이다. 중국으로 유학을 했고 현지에서 벼슬까지 한 글로벌 지식인으로써 시대 앞에 무거운 책임감을 통탄하고서 기울어가는 신라를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는 방안을 건의했을 것이다. 흔히 시무십조(時務十條)라고 부른다. 제목은 남아있지만 내용은 유실된 상태이다. 알고보면 거창한 것도 아니다. 나라운영의 기본원칙에 충실하자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천년왕조의 수명이 다해가는 것을 애써 외면하는 기득권층을 향해 듣기 싫은 소리를 나열한 까닭에 문자로 기록하는 것 조차 의도적으로 소홀하게 취급했기 때문이 아닐까. 세 살 먹은 아이도 알고 있지만 팔십먹은 노인도 실천하기 어려운 것이 ‘기본원칙’이다. 뻔히 아닌 줄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며 그냥 하던대로 관성의 법칙을 따라가기 마련인 것이 중생세계다. 물론 공동의 업력(業力)은 뜻있는 선각자의 몇 마디 말로써 고쳐칠 일은 아니겠지만.
 
당연히 임금(성골 진골 포함)의 답장은 없었다. 상서장에서 글을 올린 뒤 밑으로는 문천(蚊川)이 흐르고 멀리 월성이 보이는 바위 위에서 하염없이 답장이 오기를 기다렸다. 후학들은 그 바위를 고운대(孤雲臺)라고 이름 붙였다. 그 무렵 유행하던 예언 ‘계림황엽 곡령청송(鷄林黃葉 鵠嶺靑松 신라는 누런 낙엽이고 고려는 푸른 소나무 잎이다. 곡령은 받침을 빼고서 읽으면 고려가 된다. 예언서는 뭔가 아리쏭하게 표현해야 생명력을 가진다.)’이라는 유언비어의 저자라는 모함과 함께 반골(反骨)이라는 좌표까지 찍혔다. 이후 세상에 대한 모든 기대를 접고서 사직한 후 천하를 떠돌다가 마침내 경남 합천 가야산으로 은둔했다. 이인로(李仁老 1152~1220)의 《파한집(破閑集)》에는 “그가 신던 신발과 그가 쓰던 갓만이 숲 속에 버려져 있었다”고 마지막 행적을 기록했다. 그럼에도 경북 의성 고운사(孤雲寺)와 가야산 입구의 치원리(현재 치인리)라는 명칭으로써 그 족적을 선명하게 남겨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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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성이 내려다보이는 위치의 돌언덕인 고운대, 사진, 필자 제공] 

 
뒷날 같은 경주 최씨 집안출신이며 그의 사상을 충실하게 이어받은 최승로(崔承老 927~989)에 의해 ‘시무28조’로 구체화 되었다. 그 내용 가운데 최치원의 견해인 10개 항목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최승로 선생은 고려건국의 사상적 이념을 제공했다. 그의 뿌리였던 고운선생도 당연히 소환되기 마련이다. 고려왕실에 의해 ‘문창후(文昌侯)’란 시호가 내려지고 개인사당도 건립되었다. 조선의 성균관 문묘에는 동방18현인(賢人)으로 배향되었다. 신라는 별로 알아주지 않았지만 고려와 조선은 그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이런저런 이유로 사당은 허물어졌다. 기존 비석은 깨어지고 글씨가 뭉개졌는지 조선말기 고종 때 새롭게 정비했다. 그 비각(碑閣)이 현재 이 구역에 남아있는 가장 오랜 된 유물이라 하겠다. 나머지 건물과 부대시설은 모두 70년대 이후에 복원한 것이다.
 
경주지역의 선비인 최수(崔琇)선생은 문집 《오연유고(烏淵遺稿)》를 남겼다. 이 책은 경주 양동의 옥산서원에서 보관하고 있다. 그 내용 안에는 1723년 3월 경주 남산일대를 답사한 〈유금오산록(遊金鰲山錄)〉을 포함한다. 거기에 ‘상서장’과 ‘고운대’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그것과는 별개로 한 때는 사찰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도 나왔다. 연화문이 새겨진 석등 하대석 등이 출토되어 비각 뒤쪽 담장 한 켠에 모아 두었다. 저녁 햇살이 비치면서 돌 구조물의 음영이 자연스럽게 드러났다. 안내판에는 경주 남산 왕정곡 제3사지(寺址)라고 병기해 두었다.
 
상서장 뒤에 있는 영정각(影幀閣) 주변을 둘러 보았다. 그동안 방문했던 여느 영당과 마찬가지로 문은 굳게 잠겨있다. 뜨락을 서성이는데 유물기념관 마당에서 풀을 뽑고 있던 관리인과 눈이 마주쳤다. 가벼운 목례를 했다. 이내 관리동과 연결된 대문을 열어 주었다. 마루 앞 축담에는 야생화를 말리고 있었다. 민들레 차를 만들기 위한 밑작업이라고 한다. 살림집까지 엿보는 기회까지 주어졌다.
 
최고운 선생을 국사교과서가 아니라 물증을 통해 처음 만난 것은 사십여년 전 가야산 일대였다. 팔만대장경을 모신 장경각으로 들어가는 우회길인 서쪽 언덕이름은 ‘학사대’였다. 학사라는 명칭 자체가 선생의 관직이름인 ‘한림학사’에서 기원한다. 가야금을 뜯을 때 마다 학(鶴)들이 날아와서 감상했다고 한다. 그 자리에는 선생의 기개와 지조를 상징하는 오래된 큰 전나무 거목이 하늘을 찌를 듯이 당당하게 서 있었다. 선생의 지팡이를 꽂아놓은 것이라는 전설도 함께 따라 다녔다. 그 나무는 2019년 벼락을 맞고서 수명을 다했다.
 
고운 선생은 육두품 출신이다. 신라의 골품제라는 신분제의 한계를 절감했다. 유학갈 때 부친은 ‘인백기천(人百己千 남들이 백 배로 할 때 너는 천 배 이상 노력해라)’을 당부하셨다고 한다. 외국인을 위한 과거시험이 따로 있을 정도로 세계화된 인재발탁 시스템에 따라 합격의 영광까지 누렸다. 그러한 당나라 선진 과거제도를 신라에 도입코자 했으나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뜻이 있으면 길이 있기 마련이다. 고려 광종 때 국가적인 과거제도가 비로소 시행된 이후 조선까지 이어졌기 때문이다. 미래세대 인재들에게 자기능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그 바탕에는 최치원 선생께서 나라와 후학을 위한 ‘과거제도 시행’이라는 간절한 소원이 죽어서도 계속 이어졌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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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남산  왕정곡 제3사지 출토유물, 사진, 필자 제공] 

 
원철 필자 주요 이력

▷조계종 연구소장 ▷조계종 포교연구실 실장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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