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상컬럼] 동서식품 커피믹스에서 시작된 K-커피, 한국식 커피 산업의 탄생

한국의 커피는 조금 다르게 시작됐다. 유럽처럼 원두 문화에서 출발한 것도 아니고, 미국처럼 프랜차이즈 카페가 먼저 자리 잡은 것도 아니었다. 한국의 커피는 ‘믹스’에서 시작됐다. 물만 부으면 완성되는 한 잔의 커피. 이 단순한 방식이 한국 커피의 출발점이었고, 지금 우리가 말하는 ‘K-커피’의 원형이기도 하다.
 

커피믹스는 단순한 제품이 아니다. 그것은 산업과 생활이 결합해 만들어낸 하나의 방식이다. 커피와 프림, 설탕을 하나로 묶어버린 이 제품은 커피를 ‘만드는 음료’에서 ‘타는 음료’로 바꿨다. 이 변화는 사소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소비 구조를 바꿨다. 복잡한 과정이 사라지면서 커피는 특정 계층의 기호품이 아니라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일상재로 바뀌었다.

동서식품 커피믹스 사진동서식품
동서식품 커피믹스 [사진=동서식품]


이 지점에서 한국 산업의 특징이 드러난다. 완전히 새로운 것을 발명하기보다, 기존의 요소를 결합해 더 효율적인 형태로 재구성하는 방식이다. 커피믹스 역시 그 연장선에 있다. 커피는 이미 있었고, 프림과 설탕도 존재했다. 다만 그것을 하나의 시스템으로 묶어낸 것이다. 중요한 것은 ‘결합’이 아니라 ‘표준화’였다. 언제 어디서나 같은 맛을 낼 수 있는 구조, 그리고 대량 생산이 가능한 공정이 뒷받침되면서 커피믹스는 빠르게 확산됐다.


이 과정에는 기술과 시스템이 동시에 작동했다. 커피의 향을 유지하기 위한 냉동건조공법, 프림을 균일하게 생산하는 공정, 원료를 일정하게 배합하는 기술이 필요했다. 동시에 가격을 낮추고 유통망을 확장하는 산업적 기반도 구축돼야 했다. 이 두 축이 맞물리면서 커피믹스는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았다. 사무실, 공장, 군대, 가정 어디에서나 같은 방식으로 소비되는 음료가 됐다.


이 흐름 속에서 조필제 전 동서식품 부회장의 역할은 빼놓기 어렵다. 고인은 조선공학을 전공한 기술자로 출발해 동서식품에서 기술 부문을 이끌며 식물성 크리머 ‘프리마’와 일체형 커피믹스 개발을 주도했다. 그의 접근 방식은 명확했다. 맛을 감각이 아니라 공정의 문제로 보고, 이를 반복 가능한 형태로 만드는 것이었다. 커피 한 잔의 경험을 표준화하는 작업이었다고 볼 수 있다.

고 조필제趙弼濟 전 동서식품 부회장 사진연합뉴스
고 조필제(趙弼濟) 전 동서식품 부회장 [사진=연합뉴스]


커피믹스가 한국 사회에 안착한 배경에는 산업화의 속도도 있다. 빠르게 일하고 짧게 쉬는 환경 속에서, 복잡한 준비 과정 없이 바로 마실 수 있는 커피는 효율성과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커피 한 잔 하시죠”라는 말은 단순한 음료 제안이 아니라 관계를 여는 신호가 됐다. 커피믹스는 그렇게 한국 사회의 일상 언어로 자리 잡았다.


이제 시선을 해외로 돌려보면, K-커피의 또 다른 특징이 드러난다. 한국에서 발전한 이 ‘믹스형 커피’는 동남아시아 시장에서 빠르게 확산됐다. 더운 기후와 빠른 소비 환경, 그리고 가격 민감도가 높은 시장에서 커피믹스는 경쟁력을 가졌다. 이는 단순한 수출이 아니라 ‘한국식 커피 소비 방식’의 전파였다. 오늘날 동남아 편의점과 가정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커피믹스는 그 결과다.


흥미로운 점은, 글로벌 커피 시장이 다시 ‘편의성’을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캡슐 커피, RTD(Ready to Drink) 제품, 인스턴트 커피의 고급화까지 모두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복잡한 과정을 줄이고, 일관된 품질을 제공하는 것. 커피믹스가 이미 구현했던 가치다. 한국은 비교적 이 흐름을 일찍 경험한 셈이다.


물론 K-커피는 이제 새로운 단계로 넘어가고 있다. 스페셜티 커피, 프리미엄 원두, 카페 문화가 확산되며 소비의 다양성이 커졌다. 하지만 그 기반에는 여전히 ‘표준화된 커피 경험’이 존재한다. 커피믹스가 만들어낸 균질성과 접근성이 한국 커피 시장의 토대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새로운 문화는 기존의 기반 위에서 확장된다.


고인이 남긴 또 하나의 메시지는 산업의 방향에 대한 힌트다. 커피믹스는 단순한 아이디어에서 출발했지만, 그것을 현실로 만드는 과정은 결코 단순하지 않았다. 생산 공정, 품질 관리, 유통 구조가 함께 작동해야 했다. 질문은 단순했지만, 해답은 복잡한 시스템으로 완성됐다. 이 구조는 지금의 산업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K-커피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종종 화려한 카페 문화나 글로벌 브랜드를 떠올린다. 그러나 그 출발점은 훨씬 소박했다. 작은 봉지 하나에 담긴 커피. 물만 부으면 완성되는 한 잔. 그 단순한 경험이 한국 커피의 시작이었고, 동시에 경쟁력이었다.


커피믹스는 여전히 우리 일상 속에 있다. 그리고 그 안에는 한국 산업이 선택했던 하나의 방식이 담겨 있다. 복잡한 것을 단순하게 만들고, 그것을 누구나 사용할 수 있게 만드는 방식. K-커피는 그렇게 시작됐고, 지금도 그 위에서 확장되고 있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컴패션_PC
댓글0
0 / 300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