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도 칼럼] 에너지 위기 해법…켐페인 보다 시스템이 필요하다

김학도 한국협업진흥협회 회장
[김학도 전 중소벤처기업부 차관/논설고문] 

 
 지난달 공공기관 차량 5부제가 시행되고 석유 최고가격제도 도입됐다. 정부는 이달 초에는 자원안보위기 ‘경계’ 단계를 발령하고 에너지 절약 동참을 호소하면서 차량 2부제로 강화했다. 중동 정세 불안이 장기화되면 서 각종 에너지 사용 제한 조치가 이어지고 있지만 문제는 이 위기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는 점이다. 지금 우리 경제는 예측하기 어려운 ‘복합위기의 비상상황’이다.

이제 에너지 문제는 산업정책을 넘어 국가안보 그 자체다. 국제 유가와 천연가스 가격이 급등하면 물가가 오르고 산업경쟁력은 약화된다. 에너지 공급 차질은 생산 위축과 국민 생활 불안으로 이어진다. 에너지 안보 는 곧 경제안보이며 국가 생존전략이다.

우리나라는 이러한 충격에 특히 취약하다. 1차 에너지의 90% 이상을 해외에 의존하는 구조 때문이다. 국내에서 생산되는 원자력과 재생에너지 비중이 확대되고 있지만 여전히 석유·가스·석탄 등 화석연료 수입의존도가 높다. 여기에 반도체, 첨단산업, AI 데이터센터 확산까지 겹치며 전력 수요는 빠르게 늘고 있다. 결국 에너지 정책은 “얼마나 더 확보할 것인가”를 넘어 “어떻게 덜 쓰고 더 효율적으로 사용할 것인가”를 국가 시스템 차원에서 풀어야 한다.

물론 공급 확대는 여전히 필요하다. 원전, 재생에너지, LNG 도입처 다변화, 전력망 확충은 필수 과제다. 그러나 발전소와 송전망은 막대한 비용과 긴 시간이 들고, 사회적 갈등도 크다. 반면 수요관리, 특히 에너지 효율 향상은 훨씬 짧은 시간 안에 더 적은 비용으로 성과를 낼 수 있다.

에너지 효율이 ‘제5의 에너지원’으로 불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새로운 발전소를 짓지 않아도 낭비를 줄이면 그 자체로 공급 확대와 같은 효과를 내기 때문이다. 더 빠르고, 더 저렴하며, 더 친환경적이다. 결국 해법 은 분명하다. 공급 확대와 수요관리가 함께 가는 균형전략, 그리고 그 중심에 에너지 효율을 놓는 것이다.

우리 소비구조만 봐도 정책 우선순위는 분명하다. ‘2024년 기준 전체 최종 에너지 소비 비중은 산업 61.7%, 수송 16.5%, 상업·공공 11.6%, 가정 10.2% 순이다. 한국의 에너지 안보는 산업현장, 교통체계, 건물운영의 효율 혁신에 달려있다는 뜻이다. 특히 철강, 석유화학, 반도체 같은 에너지 다소비 산업의 체질을 바꾸지 않고서는 국가 전체의 에너지 안보를 강화하기 어렵다.

필자는 2005년 국제 유가 급등 시기에 총리가 위원장을 맡은 에너지절약추진위원회 실무를 맡아 1년여 동안 범정부 대응책을 준비한 경험이 있다. 당시 정부는 공공기관 차량 5부제, 고효율 제품, 산업·건물부문 효율 등 다양한 대책을 추진했다. 전력피크 분산을 위한 서머타임 도입도 논의했지만 사회적 비용과 부작용이 더 크다는 판단 아래 접었다. 정책은 명분만으로 밀어붙일 일이 아니라 국민 생활과 산업 활동에 미칠 영향을 냉정하게 따져야 했다.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50단계 비상 전력대책’이었다. 전력 상황이 악화될수록 단계적으로 비상조치를 강화하는 구조였다. 초기에는 심야 네온사인 소등, 골프장 야간조명 제한 같은 조치에서 시작해 상황이 심각해지면 상업용 건물 제한 급전 등 더 강한 조치로 넘어가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당시에도 원칙은 분명했다. 일반 국민의 일상에 직접 타격을 주는 조치는 맨 마지막까지 남겨두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가정용 제한 송전은 최후의 카드였다. 정책은 강할수록 좋은 것이 아니라 사회가 감당할 수 있어야 효과를 낸다.

또 하나의 교훈은 ‘정책의 내성’이었다. 에너지 절약 정책은 항생제와 비슷하다. 너무 자주 강하게 쓰면 효과가 떨어진다. 반복되는 규제는 국민과 시장을 무감각하게 만들고, 정책의 실효성을 약화시킨다. 이 점에서 최근의 가격 통제나 강제적 수요 억제 조치도 신중해야 한다. 단기 효과는 있을 수 있지만 정책 수단의 신뢰성과 지속 가능성을 해칠 위험도 있다. 위기 대응 정책일수록 단계적이고, 예측 가능하며, 국민이 납득할 수 있어야 한다.

핵심은 분명하다. 위기 때마다 소비를 억누르는 방식이 아니라 평상시부터 에너지 소비구조 자체를 고효율 시스템으로 바꾸는 것이다. '아껴 쓰자'는 구호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효율을 캠페인이 아니라 시스템으로 만들어야 한다.

산업 부문에서는 고효율 설비, 공정 최적화, 에너지 경영시스템 도입을 더 강하게 밀어붙여야 한다. 에너지 다소비 기업에는 목표관리와 인센티브, 필요하면 의무도 부과해야 한다. 건물 부문에서는 설계 단계부터 제로에너지 건축과 에너지관리시스템을 기본으로 하고, 수송 부문도 운행 제한 같은 단기 조치보다 대중교통 중심 체계와 스마트 교통관리로 전환해야 한다.

가정과 사무실도 마찬가지다. '불을 끄자' '플러그를 뽑자'는 구호만으 로는 부족하다. 사용하지 않을 때 전원을 자동 차단하는 스마트 멀티탭, 움직임에 따라 자동 소등되는 조명 시스템, 에너지 소비를 실시간으로 최적화하는 건물관리시스템(BEMS)처럼 사람의 의지가 아니라 시스템이 절약을 만들어내는 구조로 바뀌어야 한다. AI와 IoT 기술을 활용한 디지털 수요관리를 통해 시스템이 소비를 최적화하는 스마트 그리드 생태계를 완성해야 한다.

시스템의 힘은 국민의 작은 실천과 결합할 때 극대화된다. 대표적인 것이 ‘대기전력’이다. 가정과 사무실에서 무심코 낭비되는 대기전력은 한 가구당 연간 소비량의 약 10%에 달한다. 이를 국가 전체로 환산하면 약 1GW, 즉 대형 원전 1기 발전량과 맞먹는다. 우리가 플러그를 뽑고 고효율 가전을 선택하는 시스템적 습관만으로도 거대한 발전소 하나를 짓는 것과 같은 기적을 매년 만들어낼 수 있다.

에너지 안보는 발전소나 해외 자원개발 현장에서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공장과 건물, 사무실과 가정, 그리고 시민의 일상 속에서 시스템으로 구현되어야 한다. ‘보이지 않는 발전소’인 에너지 효율은 가장 깨끗하고 경제적인 안보전략이다. 정부는 정교한 인센티브와 제도를 설계하고, 기업은 기술투자로 응답하며, 국민은 시스템 기반의 실천으로 참여해야 한다. 이 세 축이 맞물려 돌아갈 때 대한민국은 어떤 지정학적 파고에도 흔들이지 않는 진정한 에너지 강국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김학도 필자 주요 이력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학 정치경제학 박사 △전 산업통상자원부 에너지자원실장 통상교섭실장 △전 중소벤처기업부 차관 △전 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 이사장 △현 한국협업진흥협회 회장 △현 충북대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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