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작에는 한 사람의 아버지가 있었다. 고(故) 한상범 전 대한항공 부사장. 그는 한국 홍보계에서 ‘달인’이라 불릴 만큼 탁월한 감각과 인간적 신뢰를 겸비한 인물이었다. 기업의 이미지를 만드는 일은 기술이 아니라 사람의 문제라는 사실을 그는 누구보다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은 직함보다 먼저 신뢰로 기억되었다.
그러나 그의 삶을 더욱 깊게 만드는 것은, 그가 끝내 내려놓지 않았던 ‘꿈’이었다. 그는 생전 가까운 이들에게 자주 말했다. 언젠가 무대 위에 서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피아니스트로 데뷔해 보고 싶다고. 기업의 전선에서 치열하게 살아가면서도 그의 내면에는 언제나 음악을 향한 순수한 열망이 살아 있었다. 그에게 피아노는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이루지 못한 또 하나의 삶이었다.
지인들을 집으로 초대해 식사를 나누고, 자연스럽게 피아노 앞에 앉아 연주를 시작하던 그의 모습은 단순한 사교를 넘어 삶의 완성이었다. 그 곁에는 늘 아내 김인겸 여사가 있었다. 프렌치 레스토랑을 운영하며 사람을 맞이하던 그는 남편의 음악과 감성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동반자였다. 두 사람의 삶은 일과 예술, 현실과 낭만이 조화를 이룬 보기 드문 균형이었다.
그의 인생에는 또 하나 널리 알려진 일화가 있다. 그가 암 진단을 받았을 당시, 대한항공을 이끌던 조양호 회장이 직접 나서 미국에서 치료에 전념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는 이야기다. 이는 단순한 기업 내 인사 차원을 넘어, 한 인간에 대한 깊은 신뢰와 애정이 만들어낸 장면이었다. 조직 속에서 맺어진 관계가 인간적 의리로 이어질 때, 그것은 하나의 품격 있는 문화가 된다. 한상범이라는 이름은 바로 그러한 관계의 중심에 서 있었던 인물이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자란 딸, 한지희는 자연스럽게 음악의 길로 나아갔다. 중학교 시절 플루트를 통해 자신의 재능을 발견했고, 부모의 결단과 헌신 속에 어린 나이에 해외 유학길에 올랐다. 그것은 단순한 교육의 선택이 아니라, 한 인간의 가능성을 믿고 밀어준 가족의 결단이었다.
그녀는 중학교 시절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수석 플루티스트 볼프강 슐츠의 추천으로 오스트리아로 유학, ‘빈 국립음대 예비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프렌치 플루트에 대한 깊은 동경으로 빈 국립음대 진학 대신 프랑스 ‘파리 불로뉴 국립 음악원’을 택했고, 프랑스 국제학교와 음악 수학을 병행하며 학업을 이어갔다. 이어 오스트리아 빈 국립음대를 졸업한 뒤 미국으로 건너가 프렌치 플루트의 거장 미셸 드보스트가 있는 오벌린 음악원을 졸업했다.
유럽과 미국에서 연주자로서의 기틀을 다진 그녀는 귀국 후 이화여자대학교 석사 과정을 마쳐 학위를 취득했고, 이후 일본 관악 교육의 명문 무사시노 음악대학 전문 연주자 과정에 진학해 일본 플루트계의 대가 카이 교수를 사사하며 음악적 지평을 더욱 넓혔다.
또한 Alain Marion, Philippe Bernold, Stéphane Réty, Benoît Fromanger, Hidesaki Sakai, Karl-Heinz Schütz 등 세계적 플루티스트들의 마스터 클래스에 참여하며 연주자로서의 깊이와 폭을 동시에 확장해 나갔다. 2023년에는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음악 박사 학위를 취득하며 학문적 완성도까지 갖춘 플루트 연주자로 자리매김했다.
플루트는 숨으로 완성되는 악기다. 소리는 보이지 않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은 누구보다 선명하다. 한지희의 연주에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피아노 소리와 어머니의 따뜻한 환대, 그리고 가족이 함께 쌓아온 시간의 깊이가 배어 있다. 그녀의 음악은 기술 이전에 삶의 기억이다.
세월이 흐르며 그녀는 한 가정의 아내이자 어머니가 되었다. 남편인 정용진 회장과 함께 가정을 이루며, 신세계 그룹이라는 큰 울타리 속에서도 조용히 자신의 길을 다져왔다. 그녀는 가정을 돌보는 일과 예술을 향한 열정을 대립시키지 않았다. 오히려 두 영역을 조화롭게 엮어내며 삶의 균형을 완성해왔다.
특히 그녀의 삶은 ‘화평복락’이라는 말로 설명될 수 있다. 가족의 형태가 다양해진 현대 사회에서 그녀는 관계를 포용하고 조화를 이루는 방향을 선택했다. 남편의 이전 가족까지 아우르며 하나의 질서를 만들어가는 모습은 단순한 미덕을 넘어 성숙한 인간 이해의 결과다. 이러한 삶의 태도는 그녀의 음악에도 고스란히 스며들어 있다.
이번에 발표된 데뷔 앨범은 단순한 출발점이 아니다. 이 앨범은 세계적인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을 통해 완성도를 높였으며, 클래식의 정통성과 현대적 감각을 함께 담아낸 작품이다. 유니버설 뮤직은 오는 24일 한지희의 첫 앨범 ‘카를 라이네케 플루트 작품집’을 도이체 그라모폰을 통해 발매한다고 3일 밝혔다.
앨범에는 작곡가 카를 라이네케의 주요 작품 세 곡이 수록됐다. ‘플루트 협주곡 D장조’와 ‘플루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발라드 D단조’는 세계적 지휘자 바실리 페트렌코가 이끄는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함께 녹음되었다. 또한 플루트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운디네’는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랑랑과의 협연으로 완성되었다.
파리에서 진행된 녹음에서 그녀는 “리허설과 녹음 내내 랑랑과 함께하며 큰 편안함을 느꼈고, 꿈이 이루어진 순간 같았다”고 회고했다. 이에 대해 랑랑은 “한지희는 이 도전적인 레퍼토리에 온 마음을 쏟아부었다”며 “이 훌륭한 프로젝트에 함께하게 되어 매우 기쁘다”고 평가했다.
현재 그녀는 SM엔터테인먼트 산하 클래식·재즈 레이블 SM클래식스 소속 아티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그의 데뷔 앨범은 단순한 음반이 아니라, 오랜 시간 축적된 음악적 성숙과 국제적 협업이 결실을 맺은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 앨범은 어쩌면 한상범 부사장이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또 다른 응답일지도 모른다. 무대 위 피아니스트로 서고 싶었던 아버지의 꿈은 이제 딸의 플루트 소리로 세상과 만나고 있다. 음악은 그렇게 세대를 넘어 이어지고, 삶의 의미를 다시 완성한다.
노자는 말한다. “대음희성(大音希聲), 큰 소리는 오히려 들리지 않는다.” 가장 깊은 울림은 요란한 곳이 아니라 조용한 삶 속에서 태어난다. 한지희의 플루트는 바로 그러한 인생 심연속의 울림이다. 그것은 화려한 기교의 소리가 아니라 사랑과 시간, 그리고 인간에 대한 이해가 빚어낸 조용한 진실이다.
결국 그녀의 음악은 우리에게 묻는다. 예술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 답은 분명하다. 그것은 한 사람의 재능이 아니라 한 가족의 사랑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 사랑이 시간을 통과할 때, 비로소 예술이 된다.
지금 이 앨범은 단순한 데뷔작이 아니다. 그것은 한 가정의 역사이며, 한 인간의 성장 기록이며, 무엇보다 삶이 음악으로 완성된 한 편의 오케스트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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