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렌트유가 배럴당 100달러를 다시 넘어선 것은 단순한 숫자의 문제가 아니다. 하루 만에 9% 넘게 뛰어오른 유가는 시장이 더 이상 이번 사태를 단기 뉴스로 보지 않는다는 뜻이다. 골드만삭스는 극단적 시나리오에서 평균 145달러를 거론했고, 일부 기관은 150달러를 넘어 200달러 가능성까지 입에 올리고 있다.
호르무즈 해협을 지나는 것은 세계 해상 원유 물동량의 5분의 1, 하루 2,000만 배럴에 달하는 석유다. 평소 하루 80척 안팎의 유조선이 오가던 길목이 이제는 한두 척 간신히 드나드는 수준으로 쪼그라들었으니, 시장이 먼저 장기전을 상정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 충격이 가장 먼저 드러나는 곳은 우리 산업의 심장부인 석유화학이다. 한국은 나프타 수입의 70%가량을 중동에 의존한다. 다른 나라에는 유가 상승이 비용 부담일지 몰라도, 한국의 석유화학 업계에는 곧바로 원료의 목줄이 죄어드는 일이다. 여천NCC가 가동률을 60%까지 낮추며 사실상 비상 운전에 들어갔고, 여기에 LG화학, 롯데케미칼에 이어 한화솔루션까지 공급 차질 가능성을 알리며 불가항력, 곧 포스 마주르를 언급하기 시작했다. 업계가 손에 쥔 나프타 재고도 길게 봐야 2주 남짓이다. 그 시간이 지나면 버티는 문제가 아니라 멈추는 문제가 된다.
한국 제조업은 오랫동안 효율과 속도를 위해 촘촘한 공급망을 자랑해왔지만, 지금 같은 국면에서는 그 촘촘함이 오히려 취약성으로 돌아온다. 한 고리가 끊어지면 그 다음 고리도 버티기 어렵다. 석유화학의 셧다운은 곧 산업 전반의 도미노로 번질 수 있다는 뜻이다.
바다길도 이미 흔들리고 있다. HMM이 중동행 신규 예약을 중단하고 항로 우회에 들어간 것은 상징적인 장면이다. 중동을 향하던 배가 방향을 틀기 시작했다는 것은 단지 물류 일정이 늦어진다는 뜻이 아니다. 그 순간부터 운임은 오르고 보험료는 치솟으며, 수출 기업의 수익성은 순식간에 깎여나간다. 컨테이너당 1,000달러를 넘는 추가 할증료는 대기업보다도 중견·중소 수출업체에 훨씬 더 잔인하다.
대한항공의 인천-두바이 노선 운항 중단 연장 역시 같은 메시지를 준다. 바닷길과 하늘길이 동시에 흔들리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전쟁의 충격은 유가 차트를 넘어 실제 산업 비용으로 육박해온다.
더 우려스러운 것은 지금 충격을 받는 산업들 상당수가 이미 체력이 바닥이라는 점이다. 철강은 중국발 저가 공세에 시달리며 구조조정의 긴 터널을 지나는 중이고, 배터리는 전기차 수요 둔화로 공장 가동률이 급격히 떨어졌다. LG에너지솔루션의 가동률이 50% 아래로 내려앉고 삼성SDI도 큰 폭의 하락을 겪은 상황에서, 에너지 가격 상승은 광물 채굴과 운송 비용을 밀어 올려 수익성에 다시 칼날을 들이댄다.
시멘트 업계도 다르지 않다. 건설 경기 침체로 이미 숨이 가쁜 업종인데, 제조원가의 30~40%를 차지하는 에너지 비용이 뛰면 남아 있던 마진마저 증발할 수 있다. 불황 속 기업에게 유가 급등은 새로운 위기가 아니라 마지막 일격이 될 수 있다.
정부도 손을 놓고 있는 것은 아니다. 유류세 인하 연장과 추경 검토, 비축유 활용 등 동원 가능한 재정 카드를 꺼내 들고 있다. 그러나 이번 위기는 돈을 풀면 진정되는 종류의 위기가 아니다. 에너지 가격 급등이 물가를 밀어 올리고, 그 물가를 잡기 위한 긴축이 다시 성장률을 깎아먹는 전형적인 스태그플레이션의 그림자가 짙어지고 있다.
국채 금리가 들썩이고 증시가 불안한 것은 금융시장이 이미 그 가능성을 먼저 읽고 있다는 뜻이다. 정부의 대응이 필요 없는 것이 아니라, 지금 필요한 대응은 단순한 경기 부양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이럴 때일수록 “설마 오래가겠는가”라는 기대가 가장 위험하다. 전쟁은 시작보다 끝내는 일이 더 어렵고, 에너지 공급망은 무너질 때보다 복구될 때 더디다. 설령 군사 충돌이 예상보다 빨리 잦아든다 해도, 생산시설 손상과 선박 운항 차질, 높아진 보험료와 경계심은 오래 남는다.
한번 올라간 원가와 긴장된 물류망은 쉽게 원래 자리로 돌아가지 않는다. 1970년대 오일쇼크가 그랬듯이, 충격은 전쟁 뉴스가 사라진 뒤에도 경제 전반에 더 길게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래서 지금 한국이 해야 할 일은 단순한 위기 관리가 아니라 에너지 안보의 발상을 바꾸는 일이다. 전략 비축유를 얼마나 방출할지 따지는 수준을 넘어, 미국과 캐나다를 포함한 대체 도입선 확보, 장기 LNG 계약 재조정, 주요 원료의 조달선 다변화를 국가 전략 차원에서 다시 짜야 한다. 동시에 고금리와 물류비 급등에 노출된 기업들이 흑자를 내고도 쓰러지는 일이 없도록 금융 안전망도 서둘러 촘촘히 깔아야 한다.
공급망은 민간이 운영해도, 위기 시 그것을 지탱하는 힘은 결국 국가의 전략과 외교에서 나온다.
역사는 위기 앞에서 정직하지 못한 나라가 반드시 더 큰 대가를 치른다고 말해왔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안심시키는 수사가 아니라 냉정하게 현실을 인정하는 용기다.
호르무즈의 문이 닫힌 오늘, 시험대에 오른 것은 단지 유가가 아니다. 한국 경제가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는지, 그리고 얼마나 빨리 구조를 바꿀 수 있는지가 함께 심판대 위에 올라 있다.
전쟁은 멀리서 벌어지지만, 그 후폭풍은 늘 가장 약한 고리부터 무너뜨린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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