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코스트 이후에도 세계는 조용히, 때로는 노골적으로 같은 잔인함을 반복해왔다. 아프리카에서, 중동에서, 미국의 거리에서, 국경을 넘어 북녘 땅에서도 인간의 존엄은 여전히 시험대에 오른다. 역사는 끝나지 않았다. 다만 장소를 바꿔 나타날 뿐이다.
“죽은 자와 산 자를 위해 우리는 증언해야 한다.” 홀로코스트 생존자이자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엘리 위젤의 이 말은 문장이 아니라 명령에 가깝다. 기억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라는 뜻에서다.
그 의무는 뜻밖의 공간에서 다시 울렸다. 서울 용산, 민주화운동기념관. 한때 남영동 대공분실이었던 이곳은 고문과 침묵, 국가 폭력의 기억을 품은 장소다. 그 공간에, 나치의 박해 속에서 그림으로 생존을 기록한 한 화가의 작품들이 걸렸다.
누스바움은 숨어 지내며 이 그림을 그렸다. 그는 이미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런 말을 남겼다.
“내가 사라지더라도, 내 그림만은 사라지게 두지 말라. 사람들에게 보여달라.”
그의 바람은 80여 년을 돌아 서울에서 실현됐다.
주한독일대사관과 주한이스라엘대사관이 공동 주최한 이번 전시는 누스바움의 작품을 단순한 역사 자료가 아닌 ‘증언’으로 제시한다. 기억은 기록으로 끝나지 않고, 오늘의 윤리로 이어져야 한다는 메시지다.
개막식에서 게오르그 슈미트 주한독일대사는 숫자로 환원되는 기억의 위험을 경고했다.
“600만 명이라는 숫자는 인간의 상상을 넘어섭니다. 우리는 숫자가 아니라 개인을 통해 이 비극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서 펠릭스 누스바움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는 독일 기본법의 첫 문장, “인간의 존엄은 침해될 수 없다”는 선언이 나치 범죄에 대한 직접적인 응답이었다고 덧붙였다. 통제되지 않은 민족주의와 배제의 정치가 어디로 향하는지를 독일은 뼈아프게 배웠다는 고백이기도 했다.
라파엘 하르파즈 주한이스라엘대사는 홀로코스트를 과거형으로 다루는 태도 자체를 경계했다.
“홀로코스트는 끝난 비극이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반유대주의는 새로운 기술과 플랫폼을 타고 증폭되고 있습니다. 기억은 책임이 아니라 의무입니다.”
행사가 열린 장소의 역사 역시 메시지를 더욱 또렷하게 했다.
이재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은 “이곳은 국가 폭력의 상처가 남아 있는 공간이지만, 이제는 그 기억을 기록하고 성찰함으로써 인권과 민주주의의 가치를 배우는 장소가 됐다”고 말했다. 기억의 장소가 침묵의 장소로 남지 않도록 하는 것, 그것이 민주주의의 조건이라는 뜻이다.
하르파즈 대사는 전시를 통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이렇게 정리했다.
“정체성 때문에 누군가를 증오하는 순간, 침묵하지 않는 것. 그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침묵은 언제나 가해자의 편이 됩니다.”
기억은 과거를 애도하는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현재를 감시하는 윤리이며, 미래를 선택하는 기준이다. 용산에서 울린 이 조용한 전시는 묻고 있다. 우리는 무엇을 잊지 않기로 선택할 것인가. 그리고 어디까지 증인이 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전시 〈기억, 미래를 위하여〉는 3월 15일까지 민주화운동기념관에서 열린다.
증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우리가 그 자리에 서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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