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화스와프 협상은 상대가 있는 만큼 대단히 은밀하게 진행되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런데 이를 공개 제안하고 협상 상황까지 공유한다는 건…." 과거 통화스와프 체결에 관여했던 고위급 경제계 인사들은 하나같이 현 정부의 공개 한·미 통화스와프 제안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하며 물밑협상을 해 온 것이 그동안의 관례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정부가 공개적으로 통화스와프 카드를 꺼낸 데는 협상력 증대 카드를 넘어서 그만한 배경이 있을 것이란 해석이다.
정부는 미국이 3500억 달러(약 488조원) 규모의 대미 투자 과정에서 현금 직접 출자 비중 확대를 요구하자 이에 대응해 무제한 통화스와프 체결을 요청했다. 외환시장 충격을 방어하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가 필요하다는 이유에서다. 한·미 통화스와프는 한국의 원화를 미국의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연준·Fed)에 맡기고 달러화를 가져오는 것을 말한다. 쉽게 말해 달러 마이너스통장 같은 개념으로 스와프 한도만큼 외환보유액이 늘어나는 효과가 생긴다.
이재명 대통령, 미 재무장관 접견 [사진=연합뉴스]
'마법의 위력' 통화스와프, 성사는 미지수
한·미 통화스와프는 위기 때마다 외환시장 안정의 방파제 역할을 톡톡히 했다. 체결 소식 만으로도 시장의 불안을 빠르게 진정시켰다. 그러나 연준은 아주 특수한 상황인 △극심한 미 달러화 유동성 부족이 나타나 △신흥국이 금융 충격을 받고 △미국 경제에 역파급을 미치는 경우만 한시적 통화스와프를 체결한다. 때문에 대다수의 전문가들은 이번 통화스와프 협정 체결 가능성을 낮게 본다.
한국과 미국은 글로벌 금융위기 때인 2008년과 코로나19 위기 초기인 2020년 두 차례 통화스와프를 체결했다. 첫 한·미 통화스와프 체결 당시엔 미국 리먼브러더스의 파산 신청 여파로 원·달러 환율이 1500원에 육박했다. 체결 규모가 300억 달러에 불과했지만 계약 체결 발표 당일 원·달러 환율은 하루새 177원 내렸고, 국가부도위험을 나타내는 CDS프리미엄은 178bp(1bp=0.01%포인트) 떨어졌다.
기재부·한국은행은 금융위기 단초가 된 리먼브러더스 파산 이후 한 달 여 만에 타결을 이끌어냈다. 한국은 당시 '리버스 스필오버(reverse spill-over)' 논리로 미국에 스와프 체결 필요성을 설득했다. 금융위기에 처한 신흥시장국이 자국 통화 안정을 위해 보유 중인 미국 국채를 팔면 미 국채 가격이 급락하고 결국 신흥국의 금융 불안이 미국으로 전이될 수 있다는 논리였다.
두 번째 한·미 통화스와프도 외환시장이 패닉에 빠진 상태에서 소방수 역할을 했다. 2020년 3월은 코로나19 사태에 따른 글로벌 경기침체 우려로 외국인 자금이 대거 이탈하면서 원·달러 환율이 1300원에 육박하던 시기였다. 이주열 당시 한은 총재는 BIS(국제결제은행) 이사로 선임된 뒤 제롬 파월 미 연준 의장과 격월로 만나며 물밑 논의했고, 홍남기 부총리는 스티브 므누신 미국 재무장관에게 자필 편지를 보내 협상에 힘을 보탰다. 그 결과 한 달도 채 안 된 시점에 첫 스와프 규모의 두 배인 600억 달러 규모 체결이 성사됐고, 원·달러 환율은 하루 만에 40원 가까이 급락했다.
[연합뉴스]
이례적 협상 과정···공포 선반영 환율 1400원대로
우리가 3500억 달러라는 현금을 구할 방법이 없는 만큼 현재로선 통화스와프 외엔 딱히 뾰족한 수가 없다는 데는 이견이 없는 듯하다. 자금 조달 과정에서 달러 수요가 급증하고 투자 과정에서 달러가 급속히 빠져나가면 원화 가치 폭락으로 이어질 수 있다. 한국투자증권은 3500억 달러가 2년간 집중 유출되면 환율이 1579원까지, 4년에 걸쳐 빠져나가도 1536원까지 치솟을 수 있다고 전망했다.
그러나 성사 여부가 미지수인 통화스와프 제안 과정을 정부가 스스로 공공연하게 밝힌 것은 이례적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통화스와프 없이 미국이 요구하는 방식대로 투자한다면 한국은 1997년 외환위기 때와 같은 상황에 직면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민석 국무총리도 "대미 투자 규모는 우리나라 외환보유고의 70% 이상에 달한다"며 "통화스와프 협정이 없다면 한국 경제에 심각한 충격이 가해질 것"이라고 분위기를 띄웠다.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통화스와프가 성사되지 않으면 충격이 너무 크다. 이는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필요조건"이라며 "(이달 말 열리는)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를 염두에 두고 협상이 진행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또 “이 대통령이 직접 외환시장 주무장관인 베선트 장관에게 통화스와프 필요성을 설명했다"며 "이창용 한은 총재 역시 국제통화기금(IMF) 본부 특강차 방미해 베선트 장관과 면담하는 자리에서 의견을 전달했다”고 설명했다.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외환위기'과 '탄핵'을 언급하며 통화스와프 이야기를 먼저 꺼내고, 통화스와프 체결이 이뤄지지 않았는데 실시간으로 상황이 공유되는 것은 전엔 없던 일이다. 특히 한은 총재가 통화스와프 계약 주체인 연준 의장이 아닌 미 재무장관과 면담했다는 사실이 대통령실을 통해 공개된 것 역시 이례적인 일로 무수한 해석을 낳고 있다. 통화스와프 체결 과정에 참여했던 전직 관료에 따르면 연준의 핵심 3인방인 연준 의장, 연준 부의장, 뉴욕 연방준비은행 총재를 설득해야 통화스와프 계약도 체결된다.
배수의 진을 친 정부의 대응에 시장의 위기의식이 고취되면서 원·달러 환율은 1400원대로 올라섰다. 대미 투자 공포가 선반영된 것이다. 특히 유독 원화만 약세를 보이고 있다. 2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미국 달러화 대비 원화 환율의 주간 거래 종가(오후 3시 30분 기준)는 전거래일보다 3.2원 내린 1400.0원을 기록했다. 주요 6개국 통화 대비 달러 가치를 보여주는 달러인덱스는 전거래일보다 0.09% 오른 97.699다. 지난 5월 환율이 1400원대였을 때 달러인덱스가 102대였던 점을 감안하면, 주요 통화들이 달러 대비 5% 강세를 보일 동안 원화만 반대로 움직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