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기호 아주대 아주통일연구소 교수(연구실장)]
새로운 대통령을 선출했던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다. 절기의 섭리 속에서 한반도의 계절만이 적대의 시간 속에 멈춰서 있다. 9월에 치러진 중국 전승절 기념식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최고인민회의 연설은 한반도의 기축을 흔들어댄 의미심장한 장면들이었다. 인정해야 한다. 북한이 한반도 내 이슈를 연일 선점하고 있다. 먼저 지난 9월 3일 베이징에서 열린 전승절 기념식에서 톈안먼 망루에 나란히 선 북·중·러 정상의 모습은 의도한 것 이상의 잘 연출된 퍼포먼스였다. 66년 전 195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10주년 열병식 당시 중국의 마오쩌둥, 소련의 흐루쇼프, 북한의 김일성은 같은 장소에 서 있었다. 정상국가 이미지를 갈망해온 김 위원장은 의기양양하게 나선 첫 다자외교의 현장에 인민복이 아닌 검은색 정장의 넥타이 차림으로 등장했다. 그가 탄 전용열차 ‘태양호’에는 그들이 ‘전승일’로 기념하는 한국전쟁 정전협정일을 의미하는 ‘7·271953’ 번호판이 달려있었다. 협정 당사자였던 중국과의 혈맹을 과시하며 미국에 맞서겠다는 북한 당국의 의도된 장치였다. 그러나 의미심장한 표징이 필요했던 것은 비단 북한만이 아니었다. 미·중 전략경쟁의 한복판에서 펼쳐진 전승절 열병식에서 입지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킨 시진핑 주석은 차세대 스텔스 전투기 J-35A, 중거리 탄도미사일 DF-26D과 극초음속 미사일 DF-17, HQ-29 요격미사일, 개량형 전략핵미사일 DF-5C 등을 앞세워 대미 항전 의지를 선보이며, 태평양 건너편을 향해 “평화냐 전쟁이냐”를 외쳤다. 반세기 넘어 북·중·러 3국 정상의 이벤트를 가능케 장본인, 트럼프 대통령은 트루스소셜에 “반미를 모의하는 푸틴과 김정은에게 따뜻한 안부 인사를 전해달라”며 응수할 뿐이었다.
러시아뿐 아니라 중국이라는 전통적 ‘뒷배’와의 우의를 대외적으로 과시하며 존재감을 선보인 김 위원장은 2주 후인 9월 21일 최고인민회의 제14기 제13차 회의에서 장문의 연설을 이어갔다. 그는 이례적으로 연말에 예정된 제13차 당 전원회의에서 총평할 법한 5개년 계획(기간산업 육성, 주민 생활 향상, 국방력 강화 등)의 성과적 완수를 미리 자평하고 대남·대미 관계에 대해 두 국가와 통일문제 및 영구적 핵 보유에 관한 입장을 노동신문과 조선중앙TV, 조선중앙통신 등을 통해 대내외적으로 정립했다. △전자는 대내 결속과 자령갱생 차원에서 남은 3개월간 성과 완수를 다그치는 의도라면, △후자는 북한이 ‘핵보유의 상수화’라는 새로운 단계로 진입했음을 “침략 동맹”으로 규정한 한국과 미국, 나아가 국제사회에 알리며 기존 대북·통일정책의 근본적인 재검토를 요구한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이렇게 숙적인 두개 국가가 통일된 사례가 세계사에 있었습니까. 어느 하나가 없어지지 않으면 안될 통일을 우리가 왜 하겠습니까"라며 "우리는 명백히 우리와 한국이 국경을 사이에 둔 이질적이며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는 두 개 국가임을 국법으로 고착시킬 것입니다"라는 사실상의 대남 메시지에 필자는 뼈가 얼얼해졌다. 무엇보다 어떤 통일도 불가능하다는 그의 현실 자각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김 위원장은 이어 트럼프 대통령과의 추억을 언급하며 미국이 선창하는 비핵화는 핵무력을 명시한 자신들의 헌법에 위배되는 것이며, 제재를 놓고 협상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 또한 이를 고집하지 않는다면 미국과 마주할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그간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의 날 선 담화에 익숙해진 청자들의 이해를 바로잡는듯한 김 위원장의 차분한 논조의 연설을 두고 일각에서는 ‘정념(情念)을 담았다’는 평가가 나온다. 미래는 누구도 예단할 수 없다. 다만, ‘정념을 담은 연설’을 두고 △북미대화 재개시 한국에도 호응할 가능성을 내포한다거나 △한 달 후 개최되는 경주 APEC에 참석하는 트럼프 대통령과의 깜짝 회동 가능성에 관한 일부 언론의 ‘희망회로’적 시각과 ‘흥행몰이’식 기사는 의도적이거나 무책임하다. 제재 완화 등을 두고 상호 거래를 가능케 하는 것이 북미 협상의 본질인데 비핵화 폐기 요구는 협상에 미련이 없다는 사인과도 같기 때문이다. 또한 북미 지도자의 추억쌓기용 깜짝 회동을 현재 상황에서 염가성 이벤트로 써버리기에는 양측의 명분이 크지 않다. 우리의 안보문제와 직결된 북핵문제에 대해 한미동맹 사이의 공감대 형성도 필수적이다. 북한의 비핵화 의제는 지난 23일 이재명 대통령이 제80차 유엔총회에서 연설한 'END' 이니셔티브 즉, 교류(Exchange), 관계 정상화(Normalisation), 비핵화(Denuclearisation)의 핵심축이며, 22일 로이터-BBC 인터뷰에서 밝힌 동결 수준의 임시조치도 결국은 비핵화를 최종목표로 두고 있다.
살펴본 것처럼 김 위원장은 중국의 전승절 참석으로 득한 대내외적 위상 강화에 이어 최고인민회의에서의 연설 등 주요 계기들을 노정된 계획표대로 활용하고 있다. 특히 통일노선 폐기를 의미하는 적대적 두 국가 관계의 언급은 벌써 네 번째다. 그는 2023년 12월 30일 노동당 전원회의에서 처음으로 남북간 적대적 두 국가론을 언급한 후, 이듬해 1월 15일 최고인민회의 제14기 제10차회의 시정연설과, 같은 해 10월 7일, ‘김정은국방종합대학’ 창립 60돌 연설에서 ‘남녘해방’과 ‘무력통일론’을 부정하며 두 국가론을 재언급하였다. 이처럼 북한은 ‘두 국가론’을 잠시 이는 바람이 아닌 헌법에 명시한 핵보유국으로서, (민족과 통일에 구애받지 않는) 국가적 미래와도 연동된 문제로 인식하고 있다. 한편, 2024년 10월 15일, 남북연결도로 폭파시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밝힌 “대한민국을 철저한 적대 국가로 규제한 공화국 헌법”이라는 워딩은 머지않아 고착화 단계에 이르면 전문을 공개할 가능성이 높다.
결국은 한반도에 존재하는 두 헌법 간의 충돌이다. 당분간 북한은 중·러 관계를 다지며 비핵화의 외풍을 개정된 핵무력 헌법에 두 국가관계를 고착화하는 식으로 방비해나갈 것이다. 반면 분단 이후 우리의 헌법 제3조와 4조의 우산은 시대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당위적 통일의 안온함을 제공해왔음을 부정할 수 없다. 이러한 우리가 북한의 노선변화를 수용할 수 있을까? 아니면 거칠게 투닥거리면서도 한민족, 조선민족을 말하고, 가끔은 조우하며 웃기도 했던 과거로의 회귀를 모색해야 할까? 한반도 구성원으로서의 기존 세계관을 송두리째 흔드는 작금의 현실에서 무엇을 뱉고 무엇을 삼켜야 할까? 우선 북한의 핵보유국론에서 두 국가론을 발골(發骨)해내야 한다. 미국발 한미동맹의 거센 청구서 앞에서, 독자적 핵무장은 결코 양해되기 어렵다. 따라서 북한의 비핵화 폐기 요구는 뱉어내야 한다. 다만 북한의 두 국가론은 오랜 기간 흡수통일의 우려에서 발원된 면이 있는 만큼 사회적 합의를 전제로 과정적·표면적으로는 삼킬 수 있다. 다시 말해 긴 호흡으로 비현실적인 민족통일론은 잠시 미뤄두고 <적대적 두 국가>에서 <냉담한 두 국가>를 지나, 적당한 계기에 <호혜적 두 국가>로 전환하기 위해 평화·공존에 관한 방책을 세우는 것이다. 결국 냉철한 현실 인식과 장기적 전략 그리고 변화에 대응하는 유연한 사고만이 한반도에 닥친 난제들을 해결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길었던 9월이 저물어간다.
▷연세대 통일학 박사 ▷통일부 과장(서기관) ▷아주대 아주통일연구소 교수(연구실장)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