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 장관이 외신기자 간담회를 하기 하루 전인 16일 열린 국무회의에서 국정기획위원회가 지난 8월 건의한 국정운영 5개년 계획안과 123개 국정과제가 확정되었다. 119번째 국정과제인 '국익 중심 실용 외교로 주변 4국 관계 증진'의 러시아 항목을 보면 ‘한·러 관계의 안정적 관리 및 발전 추진’이라는 목표 아래 ‘우리 국민·기업 권익 보호 및 한반도 평화·안정을 위해 러시아와 전략적 소통을 지속’하고 ‘양국 간 호혜적 협력 관계 복원을 위한 공감대 확대 노력을 경주’하게 되어 있다.
이 대통령은 민주당 대표 시절 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해 지난 정부의 이른바 ‘가치 외교’를 비난하였으며 새 정부의 외교 정책 기조로 ‘국익’과 ‘실용’을 강조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한국 정부는 러시아에 대해 금융거래 제한 및 수출 통제를 시행하고 있는데 현재 수출 통제 품목(HS분류 6자리)이 무려 1402개나 된다. 이 때문에 우리 기업들은 대러 수출이 급감하여 상당한 타격을 받고 있다. 또한 현대 자동차, 삼성전자, LG전자 등 우리 글로벌 기업들이 러시아 현지 생산을 위해 수억 달러씩 투자하였는데, 특히 현대 자동차는 2023년 헐값에 2년 내 환매조건부로 매각하고 철수함으로써 큰 손실을 입었으며 계약 조건에 따라 올해 12월 이후에는 환매마저 할 수 없어 그간 투자한 금액을 모두 날릴 위기에 처해 있다. 더욱이 러시아 정부는 철수한 기업들에 대해 ‘나가는 것은 마음대로였지만 돌아오는 것은 그렇지 않다’는 입장이어서 환매하더라도 원래 계약대로 이루어질지는 미지수다. 우리 경제는 온 국민이 알고 있듯이 수출의존도가 높기 때문에 이러한 상황은 국내 경기와 일자리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정부가 해외 진출 기업들이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을 보고만 있는 것을 ‘국익 중심의 실용 외교’라고 할 수 있는가?
한·러 양국 간 비자 면제 협정은 여전히 유효하나 러시아에 대한 직항 운항을 중단하였기 때문에 모스크바로 가는 우리 국민은 환승을 해야만 하고 블라디보스토크는 환승도 여의치 않아 동해항에서 배편으로 1박 2일 걸려 왕래하고 있다. 국정운영계획과 국정과제에서 말하는 ‘우리 국민·기업 권익 보호’는 어디에 있는가? 국익 중심 실용 외교는 미·일·중에만 해당되고 러시아와는 무관한 것인가? 고작 제재를 추가하지 않는 것이 1990년 국교 수립 이래 현재 최저점으로 떨어진 한·러 관계를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것인가? 무엇이 부담이 되어 한·러 간 협력을 재개할 이니셔티브를 취하길 주저하는가?
러시아와 관련된 또 다른 국정과제는 56번째 '북극항로 시대를 주도하는 K-해양강국 건설'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대선 기간 중 북극항로 개척에 대해 열의를 보였고 취임 후에는 북극항로 정책의 적극적인 추진을 위해 여러 논란이 있음에도 해양수산부의 부산 이전을 결정하였다. 과연 이 사업이 우리가 일방적으로 부산에 글로벌 거점 항만을 조성하고 쇄빙선을 건조한다고 되는 것일까? 북극항로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러시아의 협조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조 장관은 이 대통령의 중점 관심 사업의 실현에 외교부의 역할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일부에서는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러시아와 북한이 2024년에 포괄적 동반자 협정을 체결하는 등 밀착하고 있다고 반문할 것이다. 북·러 밀착은 한국의 정책에 대한 반작용인 면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지난 정부에서 나라 살림이 넉넉지 못한데도 우크라이나에 군수물자와 현금을 퍼주었으며, 2023년에는 정부의 우크라이나 여행 금지 조치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이 우크라이나를 방문하여 ‘생즉사 사즉생(生卽死 死卽生)’을 외치며 같이 싸우자고까지 하였다. 지난 정부에서 러·북 협정에 대해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였는데 중국과 북한 간에는 이보다 훨씬 강력한 동맹조약이 상존하고 있다. 중국과의 동맹조약은 너무 오래전에 체결된 것이라 무감각한 것일까? 이번에 체결된 러·북 조약은 핵심 내용을 보면 1953년 한·미 상호방위조약과 유사하다. 즉 제3국의 공격을 받은 경우에만 적용된다. 새 정부에서도 중국이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지지한다고 하면서 중국의 북한에 대한 영향력을 과대평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김정일은 ‘중국은 천년의 원수’라고 하였으며 북·중 관계의 밑바닥에 깔린 ‘불신’과 ‘긴장’은 경제원조 따위로 해소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현시점에서는 러시아의 북한에 대한 영향력이 중국의 그것보다 클 수 있다. 무엇보다도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더 필요로 하는 국가는 러시아일 것이다. 왜냐하면 러시아의 숙원사업인 3대 메가 프로젝트(철도, 가스관 및 전력망 연결)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남북한 적대관계의 해소가 필수적인 전제조건이기 때문이다. 한국은 한·러 및 북·러 관계를 제로섬 게임으로 착각하고 있다. 북·러 밀착을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한·러 관계를 정상화하는 것이 현명하며 더욱이 러시아는 한·러 관계 회복에 대해 열린 자세를 보이고 있다.
한국의 대외 정책 결정자들이 러시아의 국제적 위상 그리고 한국에 대한 경제적·전략적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러시아를 경시하는 성향이 있는데 국익을 고려할 때 하루바삐 극복되어야 한다고 본다. 지난 8월 알래스카 미·러 정상회담에서 미국 측 관심사는 우크라이나 전쟁의 종결만이 아니라 미국 석유 재벌의 러시아 사할린 가스 프로젝트에 복귀하는 것이었다. 미국도 대러시아 관계에서 실익을 추구하는데 러시아를 경시하고 경원시하는 것은 한국에서만 나타나는 기이한 현상이다.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래 서방은 그들의 계산이 있어 러시아에 대해 적대적 태도를 취하여 왔다. 그런데 한국은 러시아가 한국에 대해 무슨 해코지를 하였다고 그러는가? 새 정부 출범 이후 달라진 것은 지난 정부와 달리 대통령이 나토 정상회의에 참석하지 않은 것 정도이다. 양국 외교장관 사이에 의례적인 통화도 없었다. 이것이 ‘우리 국민·기업 권익 보호 및 한반도 평화·안정을 위해 러시아와 전략적 소통을 지속’하는 것인가? 10월 말 경주 APEC 정상회의 때 푸틴 대통령이 방한할지는 불확실하나 최소한 라브로프 외교장관이 참석할 텐데 이에 대한 대비는 하고 있는가? 이번 외신기자 간담회에서 외교장관이 러시아에 관해서 한 맥 빠지는 발언은 도대체 누구의 생각이며 입장인가?
필자 주요 이력
▷고려대 법대 법학과 ▷영국 옥스퍼드대 외교관 연수과정 수료 ▷주우즈베키스탄 공사 ▷ 주이르쿠츠크 총영사 ▷주러시아 공사 ▷상명대 글로벌지역학부 초빙교수 ▷현 유라시아전략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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