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종 칼럼] 다자주의를 살리기 위한 한국의 역할

이병종 숙명여대 글로벌서비스학부 교수
[이병종 숙명여대 글로벌서비스학부 교수]
 
세계 곳곳에서 고조되는 민족주의로 인해 다자주의의 기본 틀이 붕괴되고 있는 이 시점에, 한국이 글로벌 거버넌스(global governance)에서 더 큰 역할을 해야 한다는 주장은 다소 생뚱맞게 들릴 수 있다. 사실 최근 이재명 대통령이 일본과 미국에서 잇달아 가진 정상회담에서 보듯 한국에게는 다자주의보다는 양자 외교가 더 절실할 수 있다. 그럼에도 지난 70여 년 간 다자 기구들로부터 막대한 혜택을 누려왔고 향후에도 이 제도에 향방에 따라 운명이 갈릴 한국은 글로벌 거버넌스 체제가 무너지는 것을 방관할 수 없다. 이를 지키고 강화하기 위해 노력할 책임이 있다.
 
글로벌 거버넌스의 안보·경제 제도가 없었다면 한국은 번영은 커녕 생존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가장 중요한 다자 안보 기구인 유엔은 1950년 북한의 침략으로부터 한국을 구했다. 세계은행, 그리고 이후 세계무역기구(WTO)와 같은 경제 기구들은 한국이 전쟁의 잿더미 속에서 재기해 주요 교역국으로 성장하는 데 필수적인 지원을 제공했다. 안보와 경제를 넘어 교육, 인권, 보건, 기술 분야의 글로벌 거버넌스 또한 한국이 안정과 번영으로 나아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들은 오늘날 “내 나라 우선”을 외치는 포퓰리즘, 특히 미국 내 움직임으로 인해 약화되고 있다. 트럼프 집권 이후 반세계화 정서가 확산되면서 다자주의는 큰 균열을 격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상당 수의 다자 기구와 협정을 공격해 글로벌 거버넌스의 기반을 약화시키고 있다. 파리기후협정, 유네스코, WHO, 유엔인권이사회 등이 반미 혹은 반이스라엘이라고 비난하며 전격 탈퇴해 버렸다.
 
재집권 이후 트럼프의 공격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동맹국과 경쟁국 모두를 대상으로 높은 관세를 부과해, GATT와 WTO를 기반으로 한 전후 다자 무역 질서를 흔들었다. WTO 분쟁해결기구를 마비시키고 양자 협정을 요구함으로써 사실상 이 기구를 해체하려 하고 있다. 세계은행 또한 친중 성향과 기후변화·지속가능발전·빈곤감축 등 진보적 의제 때문에 트럼프 행정부의 비난을 받고 있다. 그의 ‘미국 우선주의’와 정면으로 충돌하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유엔에 대해서도 회의적이며, 유엔이 미국의 주권을 훼손하고 미국 분담금을 낭비한다고 주장한다.
 
가장 두드러진 것은 동맹국에 대한 노골적인 회의론이다. 트럼프는 나토와 다른 동맹국들이 오랫동안 미국을 “착취”했다고 주장하며 방위비 대폭 증액을 요구했다. 유럽이 더 많은 기여를 하지 않으면 나토를 포기하겠다고 위협하기도 했다. 그는 다자 기구보다 일대일 협상을 선호하며, 이는 기존 다자적 국제 질서를 양자 협정 네트워크로 대체하려는 의도를 드러낸다.
 
한국이 이렇게 냉혹한 현실주의적 현실을 피할 수는 없다. 특히 미국과의 관계에서는 더욱 그렇다. 최근 한미 정상회담은 미국과의 양자 협상이 한국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주었다. 관세·투자·방위 문제를 두고 이재명 정부는 엄청난 외교적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다행히 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남아공 등 다른 국가 지도자들이 트럼프와의 회담에서 겪은 모멸적이고 대립적 상황을 피할 수 있었고, 양측의 만남은 예상외로 우호적이었다.
 
그러나 한국은 워싱턴과의 양자 관계 만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 중견국이자 ‘글로벌 중추 국가’를 지향하는 한국은, 지난 수십 년 동안 생존과 번영을 가능케 한 바로 그 다자적 글로벌 거버넌스를 위해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 그간 어느 정도의 역할은 수행해 왔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은 10년간 임기를 수행했다. 한국은 세 차례 안보리 비상임이사국을 지냈으며, 2010년 서울 G20 등 대형 국제 정상 회의를 주최했다. 올해는 경주에서 APEC 정상회의를 개최할 예정이다. ASEAN, NATO, EU 등 지역 기구와도 협력을 넓히고 있다. 2010년에는 인천에 녹색기후기금(GCF)을 유치했고, 현재는 유네스코 산하 아시아·태평양 국제이해교육원도 운영하며 세계시민교육에 기여하고 있다.
 
그럼에도 한국의 전반적인 기여는 여전히 미흡하다. 우크라이나 전쟁이나 가자 전쟁 같은 중대한 사안에 있어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소극적이다. 공적개발원조(ODA) 규모도 GDP의 0.2%로 OECD 평균(0.3%)에도 못 미친다. 과거 한국이 원조 수혜국이었음을 고려하면 이는 더 아쉬운 대목이다. 주요 국제기구의 고위직에 진출한 한국인도 드물며, WTO와 국제노동기구(ILO) 수장 도전도 실패했다. 최근에는 막강한 권한을 지닌 국제사법재판소(ICJ) 재판관 선거에 후보를 냈지만 정부의 지원은 미약하다.
 
민족주의와 강대국 경쟁으로 다자적 글로벌 거버넌스는 위기에 처해 있지만,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오늘날처럼 긴밀히 연결된 세계에서, 팬데믹·기후변화·난민·핵 확산·경제 불평등 같은 문제는 어떤 단일 국가도 홀로 해결할 수 없다. 이런 난제들은 필연적으로 집단적 대응을 요구한다. 다자 체제는 현실주의적 권력 정치에 의해 재편될 수는 있지만, 오히려 세계적 과제의 복잡성 때문에 지속될 것이며, 경우에 따라 더욱 강화될 수 있다.
 
한국 앞에는 분명한 선택지가 있다. 과거처럼 글로벌 거버넌스의 수혜자에 머무를 것인가, 아니면 미래 세계를 규정할 제도를 함께 만들어가는 적극적 기여자가 될 것인가. 민족주의와 다자주의의 갈림길에서 소극적 방관자가 될지, 아니면 지난 70여 년 간 큰 도움을 준 다자 체제를 지키고 되살리는데 앞장을 설 것인지 결정해야 하는 시점이다.



 
필자 주요 이력
▷연세대 언론정보학 박사 ▷AP통신 특파원 ▷뉴스위크 한국지국장 ▷서울외신기자클럽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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