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노 칼럼] 한국 제조업을 다시 위대하게 (Make Korea Manufacturing Great Again)  

이학노 동국대 명예교수국제통상학
[이학노 동국대 명예교수(국제통상학)]


 
석유화학 구조조정이 커다란 이슈가 되고 있다. 우리나라 10대 수출 품목에서 빠지지 않고 있는 석유화학. 글로벌 공급 증가와 거센 국제 경쟁의 파고에 고전하는 상황이다. 석유화학뿐만이 아니다. 철강도 어렵고 다른 품목들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경제를 이만큼 올려 세운 것도 수출이고 제조업인데 제조업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다.
 
'젊어 고생은 사서라도 하라'는 우리 격언은 젊은 나이에 기반을 닦아 놓으면 중년 이후에도 먹고살 수 있으니 젊은 시절에 열심히 하라는 말일 것이다. 1960~1970년대 중화학 산업 육성과 수출 드라이브 정책은 많은 비판과 논쟁의 대상으로 남아 있지만 우리나라가 오늘날 제조업으로, 수출로 먹고사는 것은 결국은 그 정책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요즈음 방위산업이나 원전 등이 수출경쟁력을 갖는 것도 국방력 향상에 대한 노력과 에너지 산업에 대한 투자의 산물인 것도 같은 맥락이다.
 
2024년 우리나라 10대 수출 품목은 반도체, 자동차, 석유제품, 선박, 합성수지, 자동차부품, 철강, 디스플레이, 휴대폰, 정밀화학 등으로 이들의 전체 수출 비중은 50%를 넘는다. 1996년 이후 10대 수출 품목에서 빠진 품목은 섬유, 직물 등 2개에 불과하다. 현재 우리나라 주종 수출 품목 중 자동차, 석유제품, 선박, 합성수지, 철강, 정밀화학 등은 중화학 산업 육성 정책에 뿌리를 두고 있으니 무려 80년 넘는 긴 세월 동안 우리 경제의 버팀목 역할을 해 오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이들 중에서 국제 경쟁을 견뎌 나가는 품목은 자동차 정도이고 다른 품목들은 중국을 비롯한 후발 주자들의 거센 추격에 고전하고 있다. 중국을 필두로 많은 나라들이 중화학 산업에 대규모 시설투자와 운전 경험을 쌓아 오고 있어 우리의 비교우위가 급속히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중화학 제품의 생산물은 수출 상품을 위한 원료 등 내수와 직수출로 공급된다. 이 두 가지 판로가 모두 어려워지고 있다. 내수는 수입 물량과 해외 투자의 증가로 국산에 대한 수요가 줄고 있다. 직수출도 각국의 설비 확충으로 쉽지 않은 상황이다. 게다가 글로벌 생산량이 늘어나면서 가격마저 하락하고 있다.
 
요즈음 문제가 된 석유화학이 국제 비교우위가 사라지는 대표적 품목이다. 글로벌 경기 침체로 수요가 감소하는 가운데 중국의 생산량이 늘어나면서 가격이 급감하고 있고 국산 합성수지의 영업이 타격을 받고 있다. 중국은 2014년 2000만톤 수준이던 에틸렌 설비 능력을 10년 만에 5000만톤을 넘겼다. 한국 생산능력(1200만톤)의 두 배가 안 되었다가 4배 이상으로 증가한 셈이다. 게다가 사우디아라비아를 필두로 중동 국가들이 원유에서 나프타를 거치지 않고 에틸렌 등 기초유분을 직접 뽑아내는 COTC(Crude Oil to Chemical) 공법의 시설투자를 늘려오면서 수년 내 생산비가 우리의 3분의 1 수준밖에 되지 않는 대량생산이 가능하다는 전망이다.
 
이와 같은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을까. 그렇지 않다. 이미 2000년대 초반부터 중국의 생산 증가와 중동 국가들의 COTC 확대는 예견되었다. 개구리가 물의 온도가 서서히 올라가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언젠가 닥칠 위협에 대한 대비가 부족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석유화학은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소위 재벌기업들이 주도하고 있는 업종이다. 덩치가 큰 재벌기업들은 국내 시장을 균점하고 있거나 그룹 계열기업 간 협력도 가능해서 상대적으로 변신에 둔감하다. 그 대신 포획하고 있는 국내 수요를 가지고 어려운 상황을 돌파하려고 시도하곤 한다. 2000년대 수입 물량이 증가할 우려가 있자 할당관세를 통한 수입 관세 인하를 반대하는 한편 높은 판매가를 유지함으로써 수요자인 플라스틱 업계와 커다란 갈등을 빚기도 했다. 결국 공정위에서 여러 차례 가격담합으로 제재를 받기도 하였다. 수익을 올리기 위한 쉬운 방법보다 업계가 경쟁력을 높이는 절치부심의 노력을 더 기울였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철강산업도 석유화학과 마찬가지로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정치권에서 철강산업 지원법을 제정하고 있지만 국제경쟁력을 떠받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치열한 국제 경쟁에서 우리의 주력산업으로 오랫동안 우리 경제에 기여해 온 산업들이지만 구조조정의 힘든 노력을 해야 하는 상황이 온 것이다.
 
모든 산업과 모든 기업을 지키면서 갈 수는 없다. 산업의 국제적 재편 과정을 보면 올라오는 나라와 내려가는 나라들이 있고 기업들도 바뀐다. 우리의 섬유, 직물, 신발산업이 비교우위를 잃었다. 전통적인 조선업의 강자인 유럽은 1960년대까지 일본과 양강 구도를 유지하였지만 인력 문제 등 어려움이 닥치면서 1980년대 들어 본격적인 구조조정을 추진하였다. 커다란 선박을 만들지만 조선업은 자본집약적 특성을 가짐과 동시에 많은 인력이 필요한 업종이다. 전통적 제조업종의 자리에 차세대반도체, 인공지능, 바이오 등 새로운 산업이 자리매김하여야 한다.
 
스웨덴 남부 도시 말뫼의 조선업체 코쿰스(Kockums)는 스웨덴 조선 산업의 중심지였다. 한국 등 신흥 조선 강자들에 밀려 조선소를 폐쇄하고 2002년에는 단돈 1달러에 현대중공업에 마지막 크레인을 팔아 ‘말뫼의 눈물’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 지금 말뫼는 폐허인가? 그렇지 않다. 조선소 자리에 말뫼대학이 들어섰고 이웃 나라 덴마크의 코펜하겐을 잇는 다리를 건설하면서 바이오·제약·게임산업이 성장하였다. 조선소가 문을 닫던 당시와 비교해서 현재 말뫼의 인구는 50%나 증가하였다.
 
최근 우리 조선업이 대미 통상협상(MASGA)에 1등 공신으로 기여하면서 주목받고 있다. 중국과 엎치락뒤치락하면서 치열한 국제 경쟁을 이어오고 있는 우리 조선업. 세계 조선 강국 트로이카 중 일본이 산업구조조정 일환으로 생산능력을 감축한 가운데 대중국 국제 패권 싸움을 벌이고 있는 미국이 자국 조선산업 부흥을 위해서는 한국이 유일한 선택지로 남아 있는 상황이다. 미국 수요가 늘어난 것은 우리 조선업, 그리고 대미 통상을 위해서는 참으로 잘된 일이지만 우리 조선업이 당면하고 있는 숙련공 부족 문제 등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뼈를 깎는 구조조정의 부담은 두말할 나위 없이 업계 몫이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석유화학 구조조정에서 정부가 업계에 자율적 구조조정 노력을 요구하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고 본다. 다만 정부는 업계의 고통을 최소화하면서 구조조정을 할 수 있도록 공정거래나 세제 등 제도적 방안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구조조정 일환으로 몸집을 줄여야 하는 업계에 정부가 고용유지를 요구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본다. 앞뒤를 막아 놓고 몰아세우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의 제조업은 여건이 좋지 않다. 미국은 우리의 대표 산업인 반도체, 자동차는 물론 이차전지 등까지 미국에 공장을 지으라고 압박하고 있다. 수도권을 선호하는 산업인력군은 지방에 있는 제조업체에 가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뿐만이 아니다. 중대재해처벌법이나 소위 노란봉투법도 업계에 커다란 부담이 되고 있다는 평가이다. 일자리가 해외로 빠져나가고 사업하기 어려워서 기업이 위축되면 우리 경제와 일자리는 어떻게 지탱할 수 있을까.
 
변화하는 국제경쟁력 상황과 수출 환경 속에서 우리의 산업구조를 어떻게 가져갈지 결정해야 한다. 조선업을 잃어버린 말뫼의 눈물이 아니라 새로운 산업을 받아들인 말뫼의 웃음을 우리는 명심할 필요가 있다. 과거의 제조업을 환골탈태하고 한국의 제조업을 새롭고 강하게 만들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긴 안목과 모두의 인내가 필요하다.

이학노 필진 주요 이력

△서울대 경제학과 △텍사스대 오스틴캠퍼스 경제학 박사 △통상교섭민간자문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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