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승연 경희대학교 사회학과 명예교수]
부인 카타리나는 루터로 상징되는 종교개혁의 반쪽을 완성시킨 사람이다. 당시에 많은 사람이 ‘그녀가 없었다면 루터가 그러한 역동적인 활동을 할 수 없었을 것’이라며 그녀의 역할을 인정하고 한결같이 칭찬했다. 종교개혁이 만들어준 새로운 세상, 그 세상의 절반을 책임져준 여성이었다. 기독교 신자뿐 아니라 페미니스트들도 반드시 알아야 할 여성이다.


<수녀원을 탈출한 수녀>
그녀는 이름(von)에서 알 수 있듯이 귀족 가문 출신이다. 아버지는 작센 지방 기사계급의 몰락한 지방 귀족이었다. 카타리나는 5세 때(1504) 라이프치히 근처의 님쉔(Nimbschen) 수녀원에 보내졌다. 수녀원은 여성들이 글과 음악 그리고 라틴어 등을 배울 수 있는 유일한 교육기관이었다. 카타리나는 그곳에서 라틴어와 성경을 배우는 일뿐 아니라 자급자족을 해야 했던 수녀원에서 땅을 갈고, 채소와 허브를 키우고, 가축도 돌보고, 빵도 만들고, 간단한 의약품과 치즈와 맥주 제조 기술을 배웠다. 그녀는 16세인 1515년에 그곳에서 정식 수녀가 되었다.
카타리나가 님쉔수녀원에서 지낼 때 루터가 1521년 쓴 ‘수도원 서약에 대하여’라는 글이 비밀리에 수녀원에 전해졌다. 카타리나를 비롯한 젊은 수녀들은 ‘수도서약은 인간의 전통이지 하나님의 계명이 아니다’라는 주장에 큰 충격을 받았다. 루터는 수도원생활, 고해성사, 독신서약 등의 카톨릭 전통을 비판하면서 특히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얻는다’라는 신념을 강조했다. 이 글은 수녀들 삶의 근거를 뿌리째 흔들었다. 그 후 카타리나는 수녀원 생활이 의무가 아닌 잘못된 강요이며 수도생활이 하나님께 다가가는 길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제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루터의 글들을 읽으면서 자유로운 신앙, 개인의 자유, 인간적인 삶에 대해 눈을 떴다. 카타리나와 수녀들은 비밀리에 루터에게 탈출하고 싶다는 편지를 보냈다. 1523년 부활절 전날 밤 루터가 보낸 상인의 도움으로 청어를 실어 나르는 마차에 숨어서 9명의 수녀가 수녀원을 탈출했다. 당시에 수녀서약을 하면 가족에게 돌아가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고 탈출은 처벌을 받는 중범죄였기 때문에 목숨을 건 탈출이었다. 수녀들의 탈출이 알려지자 독일 사회가 발칵 뒤집어졌다. 탈출한 수녀들은 앞날이 불안했다. 루터도 처음에는 걱정이 많았으나 이들을 하나하나 후원자 가정에 연결해 주었고 또 중매로 결혼을 주선하였다. 당시에 여성들은 결혼하거나 하녀가 되는 길 이외에는 살아갈 길이 막막했던 때였다.

<수도사와 결혼한 수녀>
카타리나에게도 혼사 얘기가 오가던 청년이 있었는데 그의 집안에서 수녀 출신인 여성과의 결혼을 반대해서 성사되지 못했다. 그 후 루터는 카타리나를 어떤 목사에게 소개하려 했으나 자존심이 강하고 독립적인 성격인 그녀는 루터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녀는 자신의 결혼이 수동적으로 결정되기를 원치 않았고 결혼 상대를 직접 선택하기를 원했는데 그 상대가 마르틴 루터 목사였다. 카타리나는 도망 나온 빈털터리 수녀임에도 불구하고 아주 똑똑하고, 전혀 주눅들지 않고, 항상 자신감에 넘쳐있어 주변 사람들은 그녀를 결혼하기 어려운 여성으로 여겼다. 루터는 그녀의 청혼에 처음에는 망설였지만 결국 받아들이고 두 사람은 1525년 6월 13일에 매우 간단한 예식을 치르고 결혼하게 된다. 루터는 종교개혁을 통해 성직자의 결혼을 허용해야 한다는 신념을 강조하였는데, 정작 자신은 수녀들이 결혼할 수 있도록 소개할 생각만 했지 본인은 결혼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카타리나의 청혼에 생각을 바꾸었다. 결혼 후 루터는 가정생활을 통해 카타리나에 대한 존중과 애정이 깊어졌다. 카타리나의 명석함과 부지런함, 적극적인 성격 때문이었다. 루터는 “카타리나를 사랑하며 그녀는 내가 만난 최고의 관리자”라 말했다. 이렇게 루터와 카타리나는 결혼을 통해 종교개혁을 인간적으로 실천하고 강화하게 된다.
두 사람의 결혼 소식은 카톨릭이 지배하던 유럽 전역에 엄청난 충격이었다. 비텐베르크(Wittenberg) 대학의 동료 교수들과 학생들, 루터를 돕던 제후들, 마을 주민 모두에게 놀랄만한 뉴스였다. 결혼으로 인해 두 사람은 카톨릭 신자뿐 아니라 개혁파 쪽의 사람들에게도 심한 비웃음과 조롱을 받았다. 카타리나는 수녀원에서 도망 나와 무일푼에 기댈 곳도, 오갈 데도 없는 처지였고, 루터도 불법자로 교황과 황제에게 파문당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처지였다. 성직자와 수녀는 결혼할 수 없고 독신생활이 철저히 강요되었는데 이들의 결혼은 당시에 견고하게 유지되던 교황의 권위를 부정하고 교회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확대되었다.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교회 세력과 일반사람은 이 결혼을 큰 스캔들로 여기며 심하게 비난하였다. 루터에게는 ‘타락한 이단자’, ‘색욕에 빠진 수도사’라 하였고, 카타리나에게는 수도사 루터를 꼬셔서 타락시켰다고 조롱하며 ‘악마와 결혼한 여인’, ‘수녀원의 배신자‘라고 비난했다. 또한 이 결혼 사건으로 루터의 도덕성을 폄하하고 종교개혁의 정당성을 훼손하려 했다. 두 사람의 결혼은 루터를 이단으로 몰아가는 데 추가적인 명분을 제공하기에 충분했다. 루터는 변명하지 않았다. 결혼이 신의 뜻에 합당한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공개적으로 얘기했다. “결혼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이고 인간이 마땅히 누려야 할 삶”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결혼의 신성함을 강조하며 카톨릭교회의 독신주의 교리에 대해 신학적으로 반박했다. 루터와 카라리나는 많은 비난을 견디며 사회적 편견에 용기 있게 싸워나갔다.
<기독교 가정의 모범을 보여준 결혼>
두 사람은 공개적이고 모범적인 결혼생활을 실천했다. 카타리나는 여섯 자녀를 낳아 키우면서 고아들과 환자들을 돌보고, 평균 20명이 넘는 하숙생과 손님 그리고 7-8명 정도의 하인들과 함께 생활했다. 농사짓고, 가축도 키우고, 집수리도 하고, 맥주 양조장도 관리하면서 매일 많은 식구와 손님에게 풍성한 식사를 제공했다. 뛰어난 관리능력과 부지런함으로 집안을 운영했다. 또 루터가 여러 정치적, 종교적 압박 속에서 흔들릴 때마다 카타리나는 루터에게 안정감을 주고 현실적인 조언으로 그를 뒷받침했다. 루터는 그녀를 동등한 파트너로 존중하고 아내로서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이런 부부의 모습은 개신교가 추구하는 이상적 가정의 모델로 자리 잡았고 점차 루터 부부의 결혼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지역사회는 오히려 두 사람의 결혼과 모범적인 가정생활을 개혁 사상의 일부로 인정하고 지지하게 된다. 이는 개신교에서 성직자들의 결혼이 독일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고, 또 여성이 가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며 신앙적, 사회적 주체로 인정받게 되는 변화의 시작점이 되었다. 당시에 여성이 스스로 배우자를 선택하는 일은 허용되지 않았는데 카타리나가 루터에게 결혼을 제안하고 실제로 성사시켰으며, 결혼 후 가정 경제와 자녀 교육에 책임 있는 역할을 담당한 것은 여성의 자율적 선택에 큰 의미를 갖는 사건이었다. 결국 루터와 카타리나는 비난을 피하지 않고 자신들의 삶을 통해 신앙과 사랑을 기반으로 한 가정의 모범을 보이는 것으로 세상에 정면 대응하였다. 이는 종교개혁의 역사적 흐름을 가속화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2017년 종교개혁 500년을 기념하여 독일에서 영화 한 편이 개봉되었는데, 그 제목은 ‘마르틴 루터’가 아니고 ‘카타리나 루터’였다. 영화에서 카타리나는 온갖 힘든 상황을 용기있게 또 지혜롭게 헤쳐 나갔고, 결혼 초기의 부정적인 평가를 능력과 인품으로 감화시켜 긍정적이고 존경받는 인물로 거듭났다. 카타리나의 인생 역정을 알지 못하면 종교개혁의 의미를 이해한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비텐베르크에는 루터와 카타리나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 그들의 불의에 맞서는 용기와 가족과 이웃에 대한 사랑과 헌신이 천리향, 만리향처럼 온 세상에 퍼져나간 흔적들이다. 기독교인이 성지순례로 예루살렘에 가고 로마를 방문하는 것은 알지만 왜 비텐베르크를 찾지 않는지 의문이다. 목사님들이 사모님들과 함께 꼭 가보실 것을 권한다.
황승연 필자 주요 이력
▷독일 자르브뤼켄 대학교 사회학 박사 ▷전 경희대 ㈜데이콤 공동 정보사회연구소장 ▷전 한반도 정보화추진본부 지역정보화기획단장 ▷경희대 사회학과 명예교수 ▷굿소사이어티 조사연구소 대표 ▷상속세제 개혁포럼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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