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두수 작가]](https://image.ajunews.com/content/image/2024/10/07/20241007085513492320.jpg)
[이두수 작가]
며칠간 지속된 더위는 내 육체적 한계를 드러냈고, 내 삶의 리듬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 뜨거운 여름 건설 현장에서 '노동은 곧 운동'이라며 긍정적인 마음가짐으로 일하면 일이 재미있고, 재미있으면 피곤함을 잊을 것이라 믿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과도하게 흘린 땀은 내 몸의 생체리듬을 무너뜨리고, 일에 대한 의욕을 앗아가며, 사소한 일에도 짜증마저 유발하는 '노이즈'의 시작이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 혼란은 단순히 더위 때문만은 아니었다. '물'의 문제였다. 몸무게의 70%가 물이라는 사실이 이토록 절실하게 다가온 적은 없었다. 단순한 갈증을 넘어선 탈진 상태는 이성적 판단을 흐리게 하고, 나와 세상 사이의 관계마저 뒤틀리게 했다. 물 한 병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사소한 부주의가 개인의 신체 리듬을 넘어 삶의 질서와 가치를 허물어뜨리는 경험은, '물'이라는 근원적인 존재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이 문제를 재해원인분석 툴인 '4M'으로 분석해 보면. 먼저, 사람(Man)의 문제는 나 자신의 부주의한 선택이었다. 뜨거운 몸을 식히려고 차가운 물만 벌컥벌컥 마셨고, 충분한 수분 섭취의 중요성을 간과했다. 이는 관리(Management)의 문제, 즉 개인의 건강을 스스로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결과이기도 했다. 또한, 찜통 같은 환경(Media)과 기본적인 냉방조차 쉽지 않은 건설 현장(Machine)의 물리적 한계가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나를 극한의 상태로 몰아넣었다.
실제 땀으로 인한 탈수 증세는 이성을 마비시키고 감정을 황폐하게 만들었다. 일상의 독서, 그림 그리기, 운동 같은 소중한 나의 루틴들은 무겁고 피곤한 몸 앞에서 무력하게 무너졌다. 약간 무리한 인용일 수 있지만 이 상태는 마치 에밀 뒤르켐이 사회적 규범이나 가치관의 부재, 혼란, 또는 붕괴로 인해 개인이 느끼는 불안감, 좌절감, 무력감 등 무규범 상태인 아노미(Anomie)라고 말한 그와 같은 상태였다고도 볼 수 있다. 개인의 생존을 위협하는 극단적인 환경에서 철학, 과학, 예술 같은 고차원적인 가치들은 설 자리를 잃고, 오직 생존 본능만이 남는 혼돈 그런 상태 말이다.
물: 생존을 넘어선 '로고스'의 기반
그리스의 철학자 탈레스는 만물의 근원을 '물'로 보았다. 평범한 이 시각이 그리스가 그동안 신 중심의 신화문명에서 인간중심의 철학문명으로 전환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의 혼돈 속에서 질서를 찾으려 했던 그의 시도는 '물'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에서 시작되었다. 물은 고체, 액체, 기체로 자유롭게 변한다. 고이면 썩고, 흐르면 살아 움직인다. 얼면 견고하고, 끓으면 보이지 않게 증발한다. 물은 ‘형태를 가지지 않으면서도 모든 형태가 되는’ 존재다. 물의 이러한 유동성과 포용성은 당시의 수준에선 우주의 근원이라는 말에 손색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근대에 들어와 우리는 이 ‘물’로부터 리터(Liter)와 킬로그램(Kilogram)이라는 단위마저 끌어내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10평방센티미터에 담긴1리터의 물은1킬로그램이다. 즉, 무게와 부피라는 물리 단위조차 ‘물’을 기준으로 정해졌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탈레스의 말은 단지 상징이 아니라 측정과 질서의 시작이기도 한 것이다. 이러한 보편적 기준이 세워질 때 시민의식이 형성되고 발전할 수 있었다는 것도 우린 간과해선 안될 것이다.
이는 물이 단순한 생존의 필수 요소가 아니라, 인간의 이성적 사고와 감정 조절, 그리고 사회적 관계 형성의 근간이 되는 '로고스(Logos)'의 기반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물 부족으로 뇌 기능이 저하되면 이성적 판단이 흐려지고, 타인과의 상호작용에 '노이즈'가 발생하며, 결국 '나와 물체 간에, 나와 동료, 인간들 사이의 질서가 붕괴되는 것이다. '물 한 방울'의 관리가 단순히 개인의 문제를 넘어, 관계의 파열, 나아가 문명의 취약성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큰 시사점을 준다.
'地-圖-理': 지식 탐구의 세 단계
어떤 노이즈 상태에서 로고스를 끄집어 내는 과정을 지-도-리로 간략화 해보자. 地 (현실, 경험, 데이터)는 단순히 물리적인 땅(Earth)을 넘어 우리가 감각을 통해 인지하고 경험하는 모든 복잡하고 정제되지 않은 현상 그 자체다. 무수히 많은 별들, 사과가 떨어지는 현상, 그리고 내가 현장에서 경험한 극한의 갈증과 피로가 여기에 해당한다. 圖 (개념, 모델, 재현, 체계화)는 단순히 지리적인 지도(Map)를 넘어, 현실을 이해하고 표현하며 활용하기 위한 모든 형태의 표현물, 모델, 계획, 추상적인 개념, 혹은 질서화된 정보 체계를 의미할 수 있다 밤하늘의 무수히 많은 별들 속에서 찾아낸 '별자리', 측정의 기준이 되는 '미터법', 사과의 낙하에서 유추된 '수학 공식' 등이 여기에 속한다. 나의 경험에서 얻은 ‘따뜻한 물을 마셔야 하는 내 체질에 날 덥다고 찬물만 마셔 내 몸에 음기가 서린’ 것은 나름의 체질 분석으로 나에게는 일종의 '圖'가 되었다. 理 (이치, 원리, 궁극적 법칙, 완전한 추상)는 '圖'를 통해 이해된 여러 현상이나 개념들 간의 숨겨진 연결고리, 모든 것을 관통하는 보편적인 법칙을 탐구하는 단계다. 탈레스의 '물은 만물의 근원'이라는 사유나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 양자역학의 기본원리, 그리고 동양의 이기론처럼, 개별적인 '圖'들이 가리키는 궁극적인 실체를 파악하려는 시도이자 '圖'의 한계를 넘어서는 완전한 추상의 영역이다.
'圖'를 넘어서는 직관과 지혜: 禪과 易의 가르침
우리가 만든 '圖'와 ‘理’는 아무리 정교해도 '地'의 완벽한 복사본이 아니다. 별자리가 우주의 극히 일부만을 포착한 '圖'이듯이, 우리의 모든 개념과 이론은 실재의 풍부함과 복잡성을 온전히 담아낼 수 없다. 따라서 '圖와 理’를 넘어 다시 '地'로 돌아가 직관하는 힘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
선(禪)은 언어나 문자로 표현된 '圖와 理'의 한계를 넘어, 실재('地')를 직접적으로 경험하고 깨닫는 것을 강조한다. '불립문자'의 가르침처럼, 아무리 지도를 잘 그려도 그 땅 위를 직접 걷는 경험과는 다르듯이, 선은 직접적인 '地'의 경험을 통해 총체적이고 비분석적인 이해에 도달하려 한다.
역(易)은 '변화'를 핵심 원리로 삼아 우주 만물이 끊임없이 변화하고 상호작용하는 원리를 탐구한다. 팔괘와 육십사괘라는 상징 체계('圖')를 통해 우주와 인간 세상의 변화 패턴('地')을 설명하며, 정적인 '圖'로는 다 포착할 수 없는 '地'의 끊임없는 변화와 그 속의 관계성, 그리고 그 변화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삶의 지혜까지를 '圖' 안에 담아내려 한다.
결국 선과 역은 모두 '圖와 理가 가진 본질적인 한계를 인식하고, 이를 뛰어넘어 '地'의 본질을 직접적으로 깨닫거나 '地'의 동적인 측면과 그로부터 얻는 지혜까지를 '圖와 理’ 안에 담아내려 한다는 점에서 단순한 재현이나 추상화를 넘어선다. 나의 경험 또한 그랬다. 차가운 물을 벌컥벌컥 들이키고 냉방된 휴게실에서 얻었던 순간의 쾌락은 결국 '圖'에 갇힌 미숙한 선택이었다. 몸이 보내는 신호를 외면하고 나를 고통스럽게 만든 것 역시 나의 '圖'가 '地'의 본질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나는 다시 '地'로 돌아가 나의 몸이 보내는 직관적인 신호에 귀 기울이고, 그 속에서 새로운 지혜를 찾아야 함을 깨달았다.
물 한 방울이 던지는 질문: 개인을 넘어선 문명의 문제
건설 현장에서의 물 부족 경험은 단순한 개인의 신체적 고통을 넘어선다. 그것은 물 관리, 환경 윤리, 사회 시스템, 그리고 인간 존재의 본질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요구하는 우리 모두의 문제다.
탈진 상태에서 겪은 짜증과 관계의 마찰은 한정된 자원 앞에서 발생하는 갈등의 축소판이었으며, 물 부족 환경이 인간을 '살아있는' 존재로 기능하기 어렵게 만든다는 사실은 자연과의 조화로운 관계가 깨졌을 때 인간이 얼마나 취약한 존재가 되는지를 보여주었다. 과거 군주들의 통치에서 치산치수(治山治水)를 강조하며 보와 수로를 증설한 것은 결국 식량증산을 위한 물관리의 중요성을 언급한 것이다. 지금도 물 문제는 인류 문명의 흥망성쇠와 직결된다. 도시화된 현대 사회는 복잡한 물 공급 시스템에 더 많이 의존하고 있지만, 기후 변화로 인한 가뭄이나 홍수는 이러한 시스템을 언제든 마비시킬 수 있다. '물 한 방울'의 문제는 결국 문명 전체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질문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이번 경험을 통해 나는 단순한 개인적 목마름을 넘어, 물이 생명과 질서의 근원임을 깨달았다. 혼돈 속에서 질서를 찾는 '로고스'의 힘이 약해졌을 때, 짜증과 자기 비하에 빠지는 나의 모습은그간 하찮게 여겼던 '물'이라는 근원적 요소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역설적으로 증명했다. 우리는 아직 '상선약수(上善若水)'의 의미를 낮을 곳을 향하는 물의 겸허와 만물을 이롭게 하려는 부쟁의 의미, 어떤 장애물도 돌아서 가는 유연함, 더러운 것을 씻어내고 스스로 맑아지는 정화의 힘과 포용력 이런 은유적 의미보다는 단지 '물은 흘러야 한다'라고 피상적 의미로만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물 한 방울의 소중함과 그것이 개인과 사회, 그리고 문명에 미치는 거대한 영향력을 깊이 인식할 때, 우리는 비로소 '地'에서 '圖'를 거쳐 '理'에 이르는 지식의 여정 속에서 더 큰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지혜는 이 여름날 흘린 땀방울이 헛되지 않도록, 우리의 삶과 세상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 줄 것이다. 노동을 마치고 물 한 잔을 마시며 물 한 방울이 우리의 생존과 이성, 감정, 인간 관계, 나아가 문명의 지속가능성까지 영향을 미치는 복합적인 존재임을 깨닫게 해준다.
하이쿠 한 수>
물 한 잔 무시, 길을 잃은 내 영혼 껍데기일 뿐.
水一杯無視すれば魂も空っぽう。
이두수 작가 소개
최근 수년간 일용직 건설 노동자 생활을 하면서 노동 현장의 일상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해 오고 있다. 건설 현장의 안전을 위해서는 규제보다는 노동자의 인문학적 소양 계발이 더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현장에서 몸으로 익힌 절차탁마의 정신을 실생활에 적용하기 위해 다양한 생활실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