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두수 작가]](https://image.ajunews.com/content/image/2024/10/07/20241007085513492320.jpg)
[이두수 작가]
진짜의 세상을 바라며
사람을 볼 때 우리는 정말 그 사람 자체를 보고 있는가? 아니면, 그 사람의 배경과 조건을 보고 있는가?
요즘 우리 사회를 보면, 점점 더 후자의 방식으로 타인을 판단하는 풍조가 짙어지고 있다. 어느 학교를 나왔는가, 어디 출신인가, 어떤 직장을 다니는가, 어디에 사는가 하는 질문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그 사람의 ‘등급’을 판단하기 위한 사전 정보 수집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이는 단순한 관습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사람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를 드러내는 하나의 지표다.
우상과 권위에 의탁하는 사회
이런 현상의 본질은 일종의 마조히즘적 심리이다. 스스로 판단하는 대신 누군가에게 복종하고 싶어 하는 욕망. 이것이 우상화로 나타나고, 권위주의로 이어진다. 정치를 향한 광적인 지지 또한 단순한 신념이 아니라, 질서에 복종하려는 무의식적 욕망의 발현일 수 있다.
문제는 단지 정치나 권력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취향’마저도 정치화되고 있다. 어떤 음악을 듣는가, 어떤 커피를 마시는가, 어떤 브랜드를 입는가가 그 사람의 지적 수준, 문화적 자본, 계급을 암묵적으로 드러내는 신호가 되어버렸다.
여기에는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말한 “구별짓기”와 “문화자본” 개념이 복합적으로 작동한다. 상류층은 자신의 취향을 ‘자연스럽고 세련된 것’으로 위장하면서, 그와 다른 대중의 취향을 미숙하고 천박한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한 취향의 정치화는 단순한 소비 행태를 넘어서, 사람 사이의 관계마저 서열화하고 계급화시킨다.
결국 우리는 인간을 ‘그 자체’로 보기보다, 그가 가진 배경, 학벌, 취향, 소속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판단하려 한다. 이로 인해 생기는 문제는 단지 문화적 왜곡이 아니라, 사회적 병리다. 사기, 거짓말, 과도한 경쟁, 혐오 등은 결국 이런 구조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때때로 “권위”와 “권위주의”를 혼동한다. 권위란 신뢰와 실력, 성숙한 책임감에서 비롯되는 자연스러운 리더십이다. 반면 권위주의는 권력을 휘두르고 서열을 강요하며, 자신의 우월성을 과시하는 태도다.
학벌, 출신 지역, 배경 등을 근거로 상대를 깎아내리는 행위는 가장 치졸한 권위주의의 한 형태다. 자신이 좋은 대학을 나왔다고 해서 타인의 인격을 평가하려 드는 것은, 실력의 표현이 아니라 자격지심의 다른 얼굴일 뿐이다. 그런 사회는 결국 사람을 존중하지 못하는 사회, 인간성을 잃어버린 사회가 된다.
결국 문제의 핵심은 인간 한 사람에 대한 사유의 부족이다. “그 사람”이 아닌 “그 사람이 속한 집단과 배경”을 먼저 보는 사회는 지적으로, 윤리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사회다. 인간은 배경이나 조건이 아니라, 그 사람만의 이야기, 생각, 태도로 이해되어야 한다.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화려한 이력서나 매력적인 스펙이 아니라, 타인을 있는 그대로 마주할 수 있는 눈, 그리고 스스로를 판단할 수 있는 용기다. 인간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사회야말로 진정으로 성숙한 사회다.
한 사람을 그가 가지고 있는 “무엇(What)이 아니라 “누구(Who)”로 볼 수 있는 사회, 그의 배경이 아닌 그의 존재를 존중하는 문화, 바로 그곳에서 인간다운 삶, 그리고 진짜 공동체가 시작된다.
우리 사회가 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
거짓이 판치는 시뮬라시옹의 세상
그러나 우리사회는 거짓과 속임수가 판치는 세상이 되었다. 이 세상을 망친 건 단지 몇몇 사기꾼의 출현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이미 거짓에 익숙해졌고, 어쩌면 거짓이 편한 사회를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깨끗한 사람이 어디 있어?”, “너무 순수하면 바보야”, “이기는 쪽에 줄을 서”라는 말이 너무도 자연스럽다.
사람들은 명품을 좋아한다. 하지만 품질보다는 ‘좋다고 알려진 것’이기 때문이다. 본질보다 이미지, 실체보다 명성을 쫓는다. 그 제품을 만든 노동자의 땀과 손끝은 지워지고, 대신 누가 사용했는지, 얼마나 유명한 브랜드 인지에만 관심이 집중된다. 외양이 노동의 가치를 대신하고, 간판이 손의 노고를 덮어버린다.
프랑스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는 현대 사회를 ‘시뮬라시옹의 세계’라 불렀다. 시뮬라크르(simulacre), 즉 현실을 흉내 낸 이미지들이 진짜를 대체하고, 사람들은 복제된 이미지가 진짜인 줄 착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진짜가 사라지고 가짜가 진짜인 척하는 세계. 지금 우리가 사는 현실이 그렇다.
이제 사회는 ‘진정성’이라는 말만 남았고, 실제 노동의 거칠고 투박한 진짜는 외면 당한다. 사람들은 노동을 ‘좋아하는 척’할 뿐이다. 손에 흙 한 번 묻히지 않고도, 땀 흘려 일해보지 않고도 노동의 존엄을 운운한다. 그 말이 자신을 개념 있는 사람처럼 보이게 하기 때문이다. 말은 화려하지만, 노동의 고통과 생명력은 점점 사라진다.
민주주의를 말하는 사람들조차 민주적이기보다는, 과거의 민주화 운동이라는 명분을 소비한다. 구호가 실천을 대신하고, 말이 현실을 대체한다. 진짜는 조용히 사라지고, 거짓은 요란하게 목소리를 높인다. 너무 많은 소음 속에서 진짜의 소리는 묻혀간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많은 사람들이 자기 삶을 주체적으로 살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자부심이 없으니 남의 삶을 모방하려 든다. 팬덤 문화가 정치에까지 침투하고, 외모지상주의와 돈·권력 숭배가 사회를 지배한다. 위조와 거짓말을 통해서라도 ‘좋은 학교’와 ‘좋은 직장’을 얻으려 한다. 남을 위한 봉사보다 SNS에 올라갈 사진 한 장이 더 중요하다. 심지어 이것도 실력이라고 한다.
위에서 말한 피에르 부르디외는 이러한 현상을 '문화자본' 개념으로 설명한다. 부유한 계층은 더 높은 수준의 문화와 교육에 접근할 수 있고, 이는 다시 사회적 성공을 낳으며 계층을 고착화한다. 보여지는 것에 집중하는 사회, '무엇을 아느냐'보다 '어디 출신이냐'를 중시하는 문화는 진짜를 외면하게 만든다. 진짜보다는 가짜가 더 화려하다. 어쩌면 우리사회는 진짜를 부담스러워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진짜는 여전히 있다. 건설 현장이 그 증거다. 거짓과 속임수가 통하지 않는 곳. 내가 잘못 시공하면 바로 다음 공정에 지장을 주기 때문이다. 여기선 실수가 눈에 띄고, 책임이 즉각 드러난다.
노동은 몸을 움직이는 일이고, 움직인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증거다. 살아 있다는 건 깨어 있다는 것이며, 깨어 있다는 것은 생각하고 상상하며 창조하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육체노동자는 삶의 본질에 가장 가까이 있는 존재다.
원래 인간은 누구의 길을 흉내 내는 존재가 아니다. 자기만의 길을 만드는 창조자다. 아무도 걷지 않은 길 위에 남는 발자국이 바로 새로운 길이다.
어느 날 수많은 소리가 엉킨 어수선한 건설 현장에서 망치소리가 또렷이 들려왔다. 망치소리, 아직은 인간만이 일하며 자신이 살아있음을 호소하는 듯한 울림으로 들려왔다.
망치소리
망치 소리는 뼈와 뼈가 부딪는 소리다.
쇠가 긁히는 소리로, 결코 나긋나긋한 소리가 아니다.
너와 내가 부딪히는 살 떨리는 소리다.
“안 되면 되게 하라”는 짜증나는 소리다.
오늘도 하늘에선 타워크레인이 빙빙 돌고
쉴 새 없이 레미콘 차량은 들락거리고
지게차는 어지럽게 돌아다닌다.
호각소리, 사이렌소리, 그리고 째지는 외침소리,
광장에서 들려오는 유세소리에 망치소리는 희미해진다.
진짜 세상을 만들자고 했고,
진짜가 나타났다고도 했다.
거짓이 많을수록 조미료를 많이 타고,
포장은 과해지며 목소리는 커진다.
아스라이 들리는 콘크리트 벽을 두드리는 망치소리는
살아 있다는 신호다.
각목에 못질하는 망치소리는
제대로 서라는 가르침의 소리다.
기억하라,
행복한 우리 집을 만드는 것은
땀방울에 물든 거친 망치소리임을.
‘망치소리’는 시뮬라시옹 속에서도 여전히 살아 있는 가장 정직한 소리다. 포장되지 않은 진실의 육성이며, 삶과 노동의 실재다. 보드리야르는 ‘진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나는 믿는다. 진짜는 사라진 게 아니다. 단지 너무도 많은 거짓된 소리들에 가려져 있을 뿐이다. 귀를 기울이면, 진짜는 여전히 우리 곁에 살아 있다.
이두수 작가 소개
최근 수년간 일용직 건설 노동자 생활을 하면서 노동 현장의 일상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해 오고 있다. 건설 현장의 안전을 위해서는 규제보다는 노동자의 인문학적 소양 계발이 더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현장에서 몸으로 익힌 절차탁마의 정신을 실생활에 적용하기 위해 다양한 생활실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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