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이시아 출신 디자이너 지미 추 성공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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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선 기자
입력 2018-07-09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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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런던 유학 후 창업해 세계적인 브랜드로 키워

2012년 11월 28일 말레이시아에서 열린 아시아모델시상식 신인모델대회에 디자이너 지미 추가 참석해 주목을 받았다. [한국모델협회]
 

말레이시아 출신으로 세계적인 디자이너가 된 지미 추의 성공담을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가 다뤘다.

지미 추 양 키트는1950년대 말레이시아 페낭에서 자랐다.

페낭은 한 때 영국이 점령했던 시기 동인도회사의 교역 중심지였다.

어린시절 지미 추의 방과후 일과는 세계 유명 구두 브랜드가 되는 기반이 됐다.

TV와 인터넷이나 다른 현대 기술이 없는 단순한 시기에 페낭의 조지타운 지역에서 자라면서 그는 지루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 추는 전기장치 방해 없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채울 수 없는 호기심을 가진 열정적인 젊은 디자이너가 자아 형성의 시기를 아버지의 구두가게에서 보냈다.

이 경험은 그에게 구두에 대한 깊은 열정을 불어 넣었다.

추는 일곱 살에 매일 학교를 마치고 아버지와 다른 직원들이 아름다운 수제화를 만드는 작업을 지켜봤다.

당시에는 언젠가 추라는 이름이 국제 패션계 인물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가난한 대학생이 유럽 패션 도시에서 주요 인물로 전설적인 디자인 우상이 되는 여정은 고무적이다.

이제 그의 우수 고객 명단에는 영국 왕족과 할리우드 스타들이 들어 있다.

엄청난 성공에도 불구하고 추는 만족하지 않는다.

구두 한 벌에 3000~5000달러(330~550만원)하는 새 브랜드 주양지 외에 추는 세계를 널리 돌아다니며 대학과 자선 행사에서 젊은이들이 교육을 받도록 지원하는 프로젝트를 알리고 있다.

‘기술을 통한 창조’를 믿는 그는 교육의 중요성을 전파하고 있다.

그는 성장하고 성공하기 위한 갈증을 보이는 젊은이들에 사회가 영양분을 줘야 한다고 말했다.

△ 어떻게 시작된 건가? 11살에 구두를 처음 만든 것이 사실인가?

아버지가 구두 수선공이 아니라 디자이너였고 수제로 만들었다.

구두 만드는 집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도 구두가게를 도왔다.

일곱, 여덟 살 때 집에 와서 숙제를 하고는 나머지 시간은 가게에서 아버지와 다른 사람들이 일하는 것을 지켜보던 기억이 있다.

아이폰이나 컴퓨터, TV, 계산기도 없었기에 아이 때 남는 시간을 그렇게 보냈다. 원시적이었지만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였고 그게 놀이였다.

아버지는 유능한 구두 디자이너였고 장인이었다.

여자 구두 뿐 아니라 아이와 남자 구두도 만들었다.

당시에는 손으로 먹고 살아야 했고 많은 상품이 수제로 만들어졌다.

처음 만든 신발은 어머니 생일에 만든 가죽 슬리퍼였다. 11살때였다. 다른 것보다 만들기 쉬워 슬리퍼를 택했다.

디자인도 했는데 만드는데 8시간 정도가 걸렸다.

슬리퍼를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같이 묻어 갖고 있지는 않다.

△ 크리스찬 루부땡, 샤넬 등 국제적인 럭셔리 브랜드와 이름이 동의어가 됐다. 유명해지고 성공한 것을 어떻게 보나?

여성 구두로 선택을 받고 세계적인 디자이너와 이름이 같이 불려져 자랑스럽다.

성공은 축복이고 단지 시작이다. 나 자신을 발전시키고 다른 이, 특히 젊은이를 돕는 일을 계속해야 한다.

나는 말레이시아 관광홍보대사이고 영국문화원 장학생 대사로 세계를 돌아다니며 교육을 촉진하는 연설을 하고 있다.

다이애나 왕비를 추모하는 다이애나상 자선단체의 대사도 맡아 그의 전통이 이어지도록 하고 젊은이들이 세계를 너 낫게 바꿀 수 힘이 있다는 믿음을 불어넣으려 노력하고 있다.

대사로서 젊은층을 지원하는 사회 프로그램 기금 모금을 돕는다.

사람들은 내가 지미 추 브랜드를 매각한 것을 모른다.

그 브랜드를 사람들이 여전히 상류층, 고급 상품, 상류사회와 연관 짓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 왜 고향을 떠나 런던에서 공부하기로 했나? 동기가 뭐였나?

열 다섯, 열 여섯 살에 신발을 꽤 잘 만들었다. 누나가 한 명 있었지만 나만 아버지 기술을 물려받았다. 어머니도 아버지 구두점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어머니는 요리, 청소부터 우리 옷을 만들고 모든 주부 역할을 하는 등 다양한 일을 했고 모든 것을 했다.

해야 하는 일이 있으면 어머니가 했다.

해외 교육을 받고 싶어 페낭을 떠났다. 스물 한 살에 영국으로 갔고 지금은 런던 패션대의 일부인 당시 헤크니 콜드웨이너 기술대학에서 공부했다.

졸업하고 구두 디자인 회사에 입사했다. 런던에서 이루고 싶었기에 말레이시아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같은 회사에 8년을 다녔고 사업을 시작하기 전 다른 회사를 조금 더 다녔다.

△ 어떻게 결국에는 세계에서 가장 비싸고 수요가 많아지게 된 고급 브랜드 회사를 시작했나?

두 번째 회사를 그만 둔 후 부모님들이 회사를 시작하는 것을 도왔다.

부모님은 2년 동안 있었다. 초기 투자 자금은 6000파운드(890만원) 정도로 어머니의 퇴직연금에서 나왔다.

세 명이 전부여서 매일 여성 구두를 만들고 포장하고 홍보하고 팔았다.

1986년에 사업을 확장하기로 하고 동부 끝의 버려진 병원 건물을 발견해 상점을 열었다.

1988년 런던 패션 위크에서 쇼를 한 것이 전환점이 됐다.

보그지가 내 디자인을 보고 8페이지에 걸쳐 작업을 다뤘다.

이전에는 고객이 별로 없어서 힘들었었다.

△ 지미 추 브랜드가 시작되기 전 어려운 시절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나?

매체들의 관심을 받지 못하거나 소개되지 않아서도 그렇지만 용기나 인내심이 없어서 많은 디자이너들이 포기하고 중도에 관두는 경우를 봤다.

나는 확신과 인내가 충분했기에 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 깊은 동기는 나를 믿어주고 연금을 투자한 어머니를 실망시키지 않겠다는 결정에서 나왔다.

어머니 돈을 갚는데 오래 걸리지 않았고 넉넉한 이자도 쳐서 돌려드렸다.

보그지 기사 이후에 사업이 빠르게 성장했고 헬무트 랭과 폴 스미스 같은 유명 디자이너와 무대 쇼를 진행하기도 했다.

기자들이 몰려왔다.

△ 다이애나비와 어떻게 친하게 됐나?

다이애나는 최고 고객 중 한 명이었다. 고객으로 영국 왕족 일원이 많고 상류층, 대중스타들이 많았다.

패션계 소개로 다이애나비를 만났다.

당시에 그가 보그지를 봤을거라 생각했다.

그는 매우 친절했고 내 구두에 대해 한번도 불평하지 않았다.

부모님은 내가 다이애나의 구두를 만드는 것을 알고 있었다.

캥신턴 궁으로 다이애나를 만나러 가서 구두를 전달한다고 했더니 어머니는 믿지 않았다.

어머니는 “농담하지 마라. 너는 황인종 중국인이고 그는 왕세자비다. 크리스찬 디오르나 코코 샤넬 디자인을 선호하겠지”라고 말했다.

어머니가 사실인 것을 알았을 때 왕세자비 앞에서 흉하지 않도록 가능한 돈을 아끼지 말고 세계 최고의 양복을 사라고 해서 그렇게 했다.

새 속옷과 양말까지 샀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새 것으로 꾸몄는데 부모님이 무척 자랑스러워하셨다.

새 옷을 입고 새 시작을 준비하는 구정을 기념하는 것과 같은 방식이었다.

왕세자비를 만나기 위해 새 옷을 입는 것은 내 경력의 굉장히 새로운 시작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다.

경비원들이 알아볼 정도로 캥신턴궁을 자주 방문했다. 한번은 해리 왕자가 정원에서 놀고 있었는데 나를 보더니 “재키찬(성룡)이다”라고 소리쳤다.

여전히 즐거운 기억으로 남아 있는데 그렇게 유명한 사람으로 알아봐줘 좋기도 했다

△ 사람을 규정 짓는 것은 뭔가? 인생의 모토는 뭔가?

모든 사람은 비판할 권리가 있다. 누가 나를 비판하거나 모욕을 주는 것도 그들의 의견과 권리다. 나는 그걸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자유가 있고 내가 느끼고 행동하는 데 영향을 주지 않도록 할 수 있다.

모든 이들은 선택할 자유가 있다. 나 역시 부정적인 언급을 무시할 자유가 있다. 비판이 건설적이라면 변화하고 개선하도록 노력하겠다.

배우는 것은 생활하기 위한 것이다. 인생은 모험적이고 모르는 것을 경험하려는 의지가 중요하다. 좋은 일을 하고 진실하고 정직한 가운데 가능하면 다른 이를 도우려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믿는다.

자선사업은 다른 이를 돕는 단순한 행동이 축복이기에 정신에 좋다. 2015년에 카오롱 샹그리라호텔이 자선 행사에 초청해 갔었는데 3200개 구두 디자인 후보를 심사하는 일이었다.

각각의 디자인 초안을 보는데 오래 걸렸지만 전혀 문제되지 않았고 가치 있었다.

나는 여자들 사이에서 자랐고 언제나 그들을 존경한다.

어릴 적 어머니와 사이가 매우 가까웠다.

어머니 옆에서 손을 잡고 잤다. 어머니를 존경하고 어머니도 나를 좋아한다.

구두 만들기를 좋아하고 그 세심한 과정에 익숙하다.

건물의 기초를 닦는 것과 다르지 않다. 기초에 신경을 쓰지 않으면 건물은 오래 견디지 못한다. 적절한 교육과 가족의 강한 지원이 중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좋은 가정 교육은 가족 뿐 아니라 사회와 국가에도 화합을 가져다 준다.

△ 건강 비결은?

적게 먹고 골라서 먹는다. 걱정과 화에서 벗어나도록 가능한 조절한다. 늦게 자는 나쁜 버릇을 버리기 위해 여전히 노력하고 있다. 충분히 휴식을 취하고 잠을 자는 것이 중요하다.

△ 제일 좋아하는 도시는?

홍콩을 사랑한다. 이곳에 자주 와서 휴식을 취하고 좋은 음식을 먹는다. 여기 사람들을 좋아한다.

△ 아름다움을 어떻게 정의하나?

우아하고 스타일리쉬한 것이다. 여자는 과도하게 풍만해 보이거나 너무 꾸미거나 섹시하게 보이지 않아도 된다.

△ 가장 좋아하는 취미는?
가라오케에서 노래하는 것을 좋아한다. 음악은 영감을 주고 가사는 창의력을 촉발하는데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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