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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仁차이나 프리즘] 마오쩌둥의 功過는 왜 ‘7대 3’일까

김봉철 기자입력 : 2017-08-10 11:17수정 : 2017-09-12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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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공산당에 대해 잘못 알려진 신화

[안치영 국립인천대 중국학술원 중국자료센터장(정치학 박사)]


안치영 국립인천대 중국학술원 중국자료센터장(정치학 박사)

중국에 대한 많은 신화가 있다. 그중 하나가 중국공산당(이하 중공)의 마오쩌둥(毛澤東)에 대한 평가다.

중공은 마오쩌둥의 공과(功過)를 ‘7대 3’으로 평가했다는 것이다. 선호에 따라 전면적으로 부정하거나, 심지어는 누구를 ‘반신반인’이라고 할 정도로 절대적으로 추종하는 우리나라의 세태에 대한 비판으로 자주 인용된다.

단정하건대, 중공은 결코 마오쩌둥의 공과를 7대 3이라고 평가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왜 마오쩌둥에 대한 중공의 평가가 정설처럼 됐을까?

하지만 아니 땐 굴뚝에서 연기가 난 것은 아니다.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두 가지 서로 다른 사실이 혼재돼 공이 ‘7’, 과가 ‘3’이라는 신화가 만들어졌다. 중공의 마오쩌둥에 대한 공식적 평가와 후대의 마오쩌둥 평가에 대한 마오쩌둥 자신의 바람이 뒤섞여 이 같은 신화가 만들어졌다는 얘기다.

중공의 마오쩌둥에 대한 공식적 평가는 1981년 중공의 11기 6전회에서 통과된 ‘건국 이래 약간의 역사문제에 관한 결의’(이하 역사결의)에서 이뤄졌다.

역사결의는 문화대혁명(이하 문혁)에 대해 정리하고 평가하기 위한 것이었다. 주지하다시피, 중공은 역사결의에서 문혁을 전반적으로 부정했다.

따라서 문혁에 대해 가장 주요한 책임이 있는 마오쩌둥도 비판에서 예외가 될 수 없었다. 그런데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한 마오쩌둥에 대한 부정은 공산당과 국가의 정통성에 대한 부정을 초래할 수 있는 민감한 문제였다.

그렇다고 개혁과 국가의 전환을 위해서는 문혁을 평가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마오쩌둥의 위신 유지와 문혁 부정이라는 두 가지 모순적인 과제에 봉착한 것이었다.

거기에서 공이 7이요 과가 3이라는 논리가 나온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중공은 마오쩌둥의 위신 유지와 문혁 부정이라는 두 가지 모순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몇 가지 원칙을 정한다.

먼저 마오쩌둥 개인의 성격이나 행태 등은 평가하지 않는다. 사실 건국 이래 역사결의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마오쩌둥에 대한 비판이 나왔고, 그 비서를 역임한 후차오무(胡喬木)는 울면서 이를 저지한 적이 있었다.

그것을 통해 마오쩌둥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최소화하겠다는 것이었다.

다음으로는 역사결의에서 세세하게 다루지 않고 개괄적으로 평가한다는 것이다. 세세한 평가를 하게 되면 마오쩌둥의 과오가 두드러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혁의 주요한 책임을 린뱌오(林彪)와 사인방(四人幇)에게 돌렸다.

문혁과 관련한 마오쩌둥의 과오를 인정하지만, 그가 잘못해 일으킨 문혁을 음모가인 린뱌오와 사인방이 자신들의 권력을 탈취하기 위해 이용했다는 것이다.

여기까지라면 약간은 완화됐다고 할지라도 마오쩌둥은 부정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중공은 문혁에 대한 평가를 문혁만이 아니라, 말 그대로 건국 이래의 역사에 대해 평가했다.

혁명 이후 1950년대의 황금시대, 1957년 이후 문혁 전까지의 일정한 성과도 있었지만 많은 문제도 있었던 굴절기와 문혁기 등 세 단계로 나눠 평가를 했다. 문혁뿐만 아니라 건국 이후의 전반적 역사에 대해 평가를 한 것이었다.

건국 이후의 역사를 이렇게 평가하니, 마오쩌둥이 별로 긍정적으로 보여지지 않았다. 기껏해야 공과가 ‘반반’ 정도로 보여졌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천윈(陳云)이 건국 이래 역사결의에 혁명과 건국 부분을 포함시키도록 제안했다.

그 결과, 건국 이래 역사결의에는 건국 이후뿐만 아니라 혁명에 관한 부분이 포함됐다.

혁명은 마오쩌둥의 가장 큰 공적이기 때문에 그것을 포함시킴으로써 마오쩌둥에 대해 공과가 있지만 전반적으로 공이 크다고 평가한 것이다. 공이 더 크다는 것을 공과를 7대 3으로 볼 수도 있으나, 결코 그건 아니었다.

굳이 수치화한다면 잘해야 6대 4쯤으로 평가했다고 할 수 있을까? 어쨌든 중공은 마오쩌둥이 과오가 있지만 공이 더 크다고 평가했다.

그렇다면 7대 3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앞서 언급한 대로 마오쩌둥 자신의 바람이었다. 마오쩌둥은 자신의 최후가 다가오자 측근을 모아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거기서 등장한 것이 소위 ‘공 7, 과 3’이다.

마오쩌둥은 “자신이 중국혁명과 문혁을 했는데 혁명에는 다들 아무런 이의가 없지만 문혁에는 이견이 적지 않다. 관 뚜껑을 덮으면 인간에 대한 평가가 이뤄지는데 자신도 그럴 때가 됐는데 후세에서 자신의 공과를 7대 3으로 평가한다면 자신은 만족한다”고 말했다.

낭만적 혁명가였지만 역사의 냉혹함을 알았던 마오쩌둥의 역사에 대한 최후의 바람이 ‘공 7, 과 3’이었던 것이다.

중공은 마오쩌둥을 긍정적으로 평가했지만, 그의 공과를 7대 3으로 평가하지 않았다. 긍정적으로 평가했다면 그것이 그것일 수도 있으나, 긍정적 평가와 공과의 7대 3은 천양지차다.

문혁과 마오쩌둥을 평가하기 위해 1년여에 걸친 중공 내부의 치열한 토론이 있었다. 중공의 고민과 일정한 미봉의 결과가 마오쩌둥의 과오에 대한 비판과 역사적 공헌에 대한 평가였다.

이러한 과정에 대한 이해는 생략하고 출처를 혼돈한 수치만을 가져와 우리의 역사 평가에 원용하는 것은 일정한 의의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쉬움으로 남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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