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스페셜]민주화 주장하던 염황춘추, 中은 어떻게 재갈을 물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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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6-08-17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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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경제 베이징특파원 조용성 기자 = 염황춘추(炎黃春秋)라는 월간지에 중국의 지식인들이 열광하던 시기가 있었다. 2000년대 후반에 최전성기를 구가했던 이 잡지는 정치개혁을 갈망하는 중국 지식인들에게 한줄기 빛이자 한모금의 물이었다.

이 매체는 관변이긴 하지만 비교적 독립적인 민간단체인 중화옌황문화연구소가 1991년 창간했다. 후야오방(胡耀邦), 자오쯔양(趙紫陽) 등과 함께 정치개혁을 주장했던 개혁성향의 공산당원로들이 창간주도세력이었다. 후야오방과 자오쯔양은 중국의 민주화를 주창하다가 실각된 전직 중국공산당 총서기들이다. 창간인은 광명일보 총편집, 신문출판총서 서장을 역임했던 두다오정(杜導正, 1923년생)이었다. 주로 역사문제와 정치이슈를 다루며, 원로급 인사들의 기고문이 다수 게재된다. 이 매체는 줄기차게 정치개혁과 입헌민주제, 헌정(憲政, 공산당이 아닌 헌법의 통치)을 주장해왔다.

◆후야오방 자오쯔양 동료들이 창간

2005년에는 정치개혁을 주장했던 후야오방 전 총서기에 관한 기사를 실었다가 단기간 판매금지 조치를 당했다. 2007년에는 자오쯔양 전 총서기를 찬양하는 내용이 담긴 톈지윈(田紀雲) 전 부총리의 글을 실었다. 과거 원자바오(溫家寶) 총리가 정치개혁과 민주화를 강조하는 발언을 하면, 이를 적극 옹호하고 나선것도 염황춘추였다. 이 매체는 후진타오(胡錦濤) 집정 10년동안 줄기차게 정치개혁을 주문했다. 이 기간동안 여러차례 판매금지조치를 받았지만, 창간을 주도했던 공산당 원로들의 지원 덕분에 가혹한 처분까지는 받지 않았다.

하지만 2012년 11월 태자당인 시진핑(習近平) 집정 이후 상황은 돌변했다. 시 주석은 '중국공산당 1당독재'와 '중국특색사회주의'에 대한 신념이 콘크리트처럼 굳은 지도자다. 염황춘추가 주장하는 정치개혁과 민주화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사안인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염황춘추는 정치개혁에 대한 목소리를 키워갔다.

염황춘추는 매년 베이징에서 신춘 단배식을 한다. 시주석이 총서기에 등극한 이듬해인 2013년 2월 단배식에서 후야오방 전 총서기의 아들인 후더화(胡德華)가 200여명의 지식인이 모인 상황에서 이제 막 공산당 총서기에 등극했던 시진핑을 대상으로 비판적인 목소리를 냈다. 2014년 단배식에서도 민주화에 대한 목소리가 나왔다. 마오쩌둥(毛澤東) 전 국가 주석의 비서를 지낸 리루이(李銳)는 당시 "죽을 날이 멀지 않았다면서 헌정(입법정치)이 시행된다면 영혼이 돼서도 미소를 지을 것"이라며 정치개혁을 촉구했다.
 

염황춘추 2013년 4월호. 표지기사로 '정치개혁연구' '언론자유' 등의 단어가 눈에 띈다.[사진=바이두 캡쳐]


◆첫 단추는 주관기관 교체

그동안 지켜보던 중국의 감독당국은 이때부터 염황춘추에 대한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 중국의 언론과 출판 등을 담당하는 국가신문출판광전총국은 2014년 9월15일 염황춘추의 주관기관을 2개월 내로 문화부 산하 중국예술연구원으로 변경할 것을 지시했다. 이로 인해 독립된 매체였던 염황춘추는 중국 국무원 문화부 소속 매체가 됐다. 중국 당국이 문화부를 통해 염황춘추의 편집권을 간섭하겠다는 뜻이 분명했지만, 관할권이 옮겨가는 과정에서 잡음 하나 나지 않았다. 중국의 허약한 언론현실과 막강한 당국의 힘을 반영한다. 그리고 정부의 직접적인 감독에 놓인 염황춘추의 앞길은 가시밭길 그 자체였다.

2015년 3월에 개최예정이었던 신춘단배식은 당국의 압력으로 취소됐다. 염황춘추 기자들과 외고진과 지지자인 지식인들이 모일 예정이었지만 무산됐다. 자오쯔양(趙紫陽) 전 당 총서기의 비서였던 바오퉁(鮑彤)은 "이번 사건은 당국자들이 전임자들조차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비판했지만 메아리는 없었다.

신문출판광전총국은 2015년 5월 염황춘추에 경고문을 발송했다. 그동안 당국의 염황춘추에 대한 구두경고는 많았지만, 서면경고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잡지에 게재된 기고들이 정부의 검열을 거치지 않았다는 게 이유였다. 과거와는 달라진 정부의 태도에 염황춘추는 위축됐다. 이어 양지성(楊繼繩) 염황춘추 총편집이 그해 6월 사임했다. 정부가 사직을 종용했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양지성 총편집은 입을 꾹 다물었다. 다만 퇴임직전 그는 "염황춘추가 다당제 민주주의와 권력 분립, 당 지도자와 가족 관련 이야기, 티베트와 신장(新疆)위구르자치구 독립 주장, 1989년 톈안먼(天安門) 진압, 종교 문제 등 8개 분야를 다루지 않겠다"며 "염황춘추가 존속할 수 있도록 약간의 여지를 달라"고 당국에 요청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시진핑 주석이 지난 2월 인민일보를 방문해 직원들과 대화하고 있다. 이 자리에서 시 주석은 "언론매체는 당의 의지를 체현하고 당의 주장을 반영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진=신화통신]



◆경영진교체 이은 필진교체까지

이후 염황춘추는 문화대혁명, 후야오방 평가 등 민감한 사안들에 대한 편집권을 두고 당국과 크고 작은 갈등들을 빚어왔다. 그러다가 지난달 14일 중국예술연구원은 영황춘추의 창간인인 두다오정(杜導正) 사장, 후야오방 전 총서기의 아들인 후더화(胡德華) 부사장, 쉬칭취안(徐慶全) 총편집을 면직시시키는 인사발령을 냈다. 면직대상인 경영진들은 이에 극렬히 반항하며, 즉각 정간을 결정하고, 경영진 교체 취소를 요구하는 소송을 베이징 차오양(朝陽)구 법원에 제기했다. 하지만 차오양구 법원은 지난달 22일 아무런 이유를 설명하지 않은 채 소송을 기각했다.

소송이 기각되던 지난달 22일 중국 베이징시 시청(西城)구 문화위원회는 염황춘추가 불법출판물을 발행, 판매했다는 신고를 접수했다고 밝히고 현장 조사를 실시했다. 현장조사에서 불법출판물이 발견되지는 않았지만, 컴퓨터자료와 서고자료, 재무부서 회계자료, 직원들의 소지품 등이 샅샅이 조사됐다. 결국 염황춘추 경영진은 힘없이 물러나야 했고, 새로운 경영진이 들어섰다. 구 경영진이 결정했던 염황춘추의 정간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새 염황춘추 경영진은 지난 16일 중국 공군의 대표적 매파인 다이쉬(戴旭) 대교(大校, 한국의 준장)와 중국 상무부 산하 싱크탱크의 메이신위(梅新育) 연구원, 대표적 마오이스트 학자인 궈쑹민(郭松民) 등을 신규 필진으로 선임했다. 선임된 3인의 필진은 그동안 염황춘추를 공격해왔던 극좌파인사들이다. 메이신위와 궈쑹민은 염황춘추를 공격하다가 욕설을 한 혐의로 염황춘추 전 편집장에 의해 고소를 당했었다. 염황춘추를 창간했던 인사들의 시각에서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지만, 상황은 종결됐다. 중국당국의 염황춘추 '점령작전'은 이렇게 완성됐다.

염황춘추는 대표적인 중국의 개혁성향 잡지로, 정치개혁과 입헌민주주의를 지지하는 거의 유일한 매체였다. 하지만 이제 염황춘추 역시 중국공산당의 선전정책을 충실하게 실행하는 별다른 특색없는 하나의 잡지로 '전락'하게 됐다.



◆염황춘추 주요일정
연도     내용
1991년 개혁적 원로 주도로 창간
2005년 후야오방 평론으로 단기판금
2007년 자오쯔양 평론으로 단기판금
2013년 신춘단배식에서 시진핑 비판
2014년 신춘단배식에서 정치개혁 촉구
2014년 주관기관 문화부로 교체(9월)
2015년 신춘단배식 취소(3월)
2015년 당국 서면경고문 발송(5월)
2015년 양지성 총편집 사임(6월)
2016년 사장, 부사장, 총편집 교체(7월)
2016년 보수파 3인 필진임명(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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