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여정 북한 노동당 총무부장이 실질적 군 서열 1위인 박정천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과 군사분계선(MDL) 일대를 직접 시찰하며 이달 중 모든 국경선에서 대남 확성기를 가동할 태세로 전환하겠다고 위협했다. 비무장지대(DMZ)의 군사적 완충 기능을 훼손하는 국경 요새화를 강행하면서 우리 군의 정상적인 경고 사격을 도발로 규정하고 맞대응을 예고한 것이다.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킨 북한이 되레 우리 측 대응을 문제 삼고 있다. 접경지역 긴장 완화를 명분으로 대북 확성기 방송을 중단한 우리 정부의 선의에 북한은 오히려 긴장 완화가 아닌 추가 압박으로 응답하고 있다.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북한의 위협이 갈수록 노골화하는데도 정부의 대응에서는 뚜렷한 원칙과 전략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재명 정부는 접경지역의 긴장 완화를 명분으로 대북 확성기 방송을 선제적으로 중단하고 대화와 유화에 무게를 둬 왔다. 그러나 북한은 이에 호응하기는커녕 국경 요새화를 밀어붙이고 대남 확성기 가동까지 예고했다. 상대의 행동 변화를 끌어내지 못한 채 우리만 먼저 대응 수단을 거둬들인 결과가 무엇인지 돌아봐야 한다. 대화의 문을 열어 두는 것과 안보 원칙을 양보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일방적인 양보가 반복되면 상대에게는 양보가 아니라 압박을 통해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잘못된 신호를 줄 수 있다.
북한의 대남 확성기 위협은 단순한 소음 문제가 아니다. 심리전 수단을 앞세워 우리 국민의 불안과 군의 부담을 키우고, 우리 정부의 대응 의지를 시험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을 수 있다. 북한이 실제로 확성기를 가동한다면 우리 군은 상황과 위협 수준을 면밀히 평가해 적절한 대응에 나서야 한다. 다만 과거의 행태를 근거로 북한이 반드시 어떤 순서로 행동할 것이라고 단정하거나, 이번 위협만으로 정부의 대북 정책 전체가 실패했다고 속단해서도 안 된다. 중요한 것은 북한의 의도를 냉정하게 분석하고, 도발에는 단호하게 대응하되 불필요한 군사적 충돌은 방지할 수 있는 원칙과 절차를 갖추는 일이다.
필요하다면 정부 외교안보 라인의 책임도 엄중히 물어야 한다. 정동영 통일부 장관과 이종석 국가정보원장 등을 둘러싼 경질·사퇴 요구가 제기되는 것은 대북 정책에 대한 불신이 커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신호다. 한길리서치가 지난 17~19일 전국 만 18세 이상 남녀 1019명을 대상으로 정 장관의 경질 여부를 물은 결과 ‘바꾸어야 한다’는 응답이 56.5%로 집계됐다. 이 원장에 대해서도 ‘바꾸어야 한다’는 응답이 51.3%였다.
안보 정책의 성패는 의지만으로 평가할 수 없다. 정책을 추진한 뒤 상대의 행동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국민의 안전과 군사적 안정에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를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 정부는 비판을 시대착오적 색깔론으로 몰아붙이거나 정쟁으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 정책의 성과를 국민 앞에 보여줘야 한다.
대북 확성기 방송 재개 여부도 이념이나 감정이 아니라 안보적 실효성을 기준으로 결정해야 한다. 북한이 실제로 대남 확성기를 가동하고 우리 군과 주민에게 피해를 주거나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킨다면 정부는 대북 방송 재개를 포함한 대응 수단을 신속히 검토해야 한다. 이때 대응은 단호하면서도 비례적이어야 한다.
평화는 일방적인 선의만으로 지켜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강경한 언사와 맞대응만으로 확보되는 것도 아니다. 상대가 도발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이익은 줄이고, 대화와 긴장 완화를 선택할 때 얻을 수 있는 이익은 분명히 하는 실효적인 전략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확고한 군사 대비 태세와 일관된 대응 원칙, 동맹 및 우방과의 긴밀한 공조가 뒷받침돼야 한다. 동시에 남북 간 우발적 충돌을 막을 소통 채널을 유지하고 우리 국민의 안전을 최우선에 둬야 한다.
북한의 대남 확성기 가동 예고는 정부의 대북 정책이 현실에 얼마나 부합하는지를 가늠할 시험대다. 정부는 유화책 자체를 성과로 내세울 것이 아니라 북한의 실제 행동 변화를 통해 정책의 유효성을 입증해야 한다. 북한이 도발하면 단호하게 대응하고 대화의 기회가 열리면 원칙을 지키면서 활용하는 것이 국가 안보를 책임진 정부의 책무다. 평화를 원한다면 평화를 지킬 힘과 의지를 함께 보여줘야 한다. 이제 정부는 희망적 기대에 머물러 있는 대북 정책을 재점검하고 국민이 신뢰할 수 있는 실질적인 안보 전략을 제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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