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종 정처 없이, 목적도 없이 그림자처럼 우울하고 쓸쓸하게 페테르부르크의 골목골목, 거리거리를 헤매고 다닙니다. 오, 추억이란 참!"
소설 <우리는 가장 밝은 밤에 헤어졌다> 중. (도스토옙스키 단편 <백야>, 월마 펴냄)
미국 사진 작가 데보라 터브빌(1932~2013)의 작품은 먼지 쌓인 낡은 시계를 닮았다. 얇고 투명한 밤의 베일을 한 겹 씌운 듯한 사진 속 인물들은 그림자처럼 윤곽이 희미하다. 몽환적이면서도 쓸쓸하다.
오는 23일 서울 중구 전시공간 피크닉에서 개막하는 '데보라 터브빌: 분위기'에는 찬란했던 과거의 시간이 희미하게 겹쳐 있다. 낡은 공간과 무표정한 여성들의 모습에서 오히려 화려했던 지나간 시절의 흔적이 선명하게 느껴진다.
이번 전시는 미국 무스 컬렉션과 협력해 기획한 데보라 터브빌의 국내 첫 개인전으로, 빈티지 프린트와 콜라주 원본 102점, 새롭게 제작한 프린트 88점 등 약 200점을 선보인다.
터브빌은 헬무트 뉴튼, 기 부르댕과 함께 1970년대 패션 사진의 새로운 흐름을 이끈 작가다. '하퍼스 바자'와 '마드모아젤'의 패션 에디터로 일하다 30대 중반에 본격적으로 사진을 시작했다. 그는 옷과 모델을 선명하고 매혹적으로 묘사하던 당시 패션 사진의 관습을 정면으로 거부했다. 카메라의 시선을 피하면서 각자의 생각에 잠겨 있는 모델들은 낡은 공간과 흐릿한 빛 속에서 흔들리는 윤곽으로 존재한다.
"분위기는 손에 잡히지 않지만 결정적으로 중요한 무엇이다"라는 터브빌의 말처럼, 이번 전시는 강렬한 인상을 주는 특정 작품보다 전시장 전체에 감도는 여운이 오래 남는다. 밤이 깊어도 빛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백야처럼, 작품 전반에는 손에 잡히지 않지만 사라지지 않는 '잃어버린 시간'과 '빛바랜 기억'이 있다.
전시에서는 1975년 미국 보그에 실린 '배스하우스'를 비롯해 가상 패션 잡지 '마키야주', 1981년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 의뢰로 베르사유 궁전을 촬영한 사진집 '보이지 않는 베르사유' 등을 볼 수 있다.
터브빌은 눈앞의 현실 너머에 존재하는 듯한 세계에 평생 천착했다. 보스턴 근교에서 성장한 그는 어린 시절 가족과 함께 머물렀던 메인주의 해안 마을에서부터 상트페테르부르크, 베르사유, 멕시코 산미겔 데 아옌데를 포함한 다양한 장소를 오가며 작업했다. 그는 베르사유의 화려한 궁전 모습 대신 천으로 덮인 가구와 먼지 쌓인 방, 세월의 흔적이 남은 조각상들을 프레임 안에 담았다. 찬란함이 사라진 뒤 남은 적막과 쇠락한 아름다움, 사라진 시간의 흔적을 형상화했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촬영한 사진도 인상적이다. 짙은 어둠을 배경으로 발레 무용수들의 몸짓을 포착한 사진에서는 화려한 무대가 막을 내린 뒤의 적막이 느껴진다. 발레 특유의 우아함과 화려함을 떠올릴수록 사진 속 쓸쓸함은 더욱 짙어진다.
러시아 문학을 사랑했던 터브빌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여러 차례 찾았다. 1997년 출간한 사진집 '스튜디오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푸시킨, 도스토예프스키, 안나 아흐마토바, 이오시프 브로드스키 등 러시아 문학가들의 글을 직접 골라 실었다. 이외에도 1980년대 후반부터 집필한 미발표 소설을 바탕으로 사진과 텍스트를 결합한 130여점의 콜라주 작품 '패스포트'도 볼 수 있다.
전시는 2027년 2월 28일까지. 관람료는 성인 1만5000원, 청소년 및 어린이 1만원.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르포] 중력 6배에 짓눌려 기절 직전…전투기 조종사 비행환경 적응훈련(영상)](https://image.ajunews.com/content/image/2024/02/29/20240229181518601151_258_161.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