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이차전지는 '대박'이었다. 전기차 판매가 급증하던 2020년부터 2023년까지 시장은 머지않아 배터리가 부족해질 것으로 전망했다.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은 앞다퉈 전기차 판매 목표를 내놨고 각국 정부도 보조금과 세제 혜택을 앞세워 투자를 부추겼다. 배터리 업체와 소재 기업들은 수요가 계속 증가할 것이라는 전제 아래 공장을 늘렸으며 시장은 아직 발생하지 않은 미래의 이익까지 기업가치에 반영했다.
그러나 전기차 수요는 기대만큼 빠르게 늘지 않았다. 고금리와 비싼 차량 가격, 충전 인프라 부족, 배터리 폭발 사고 등이 소비자의 구매를 늦췄고 완성차 업체들도 전기차 투자와 출시 일정을 조정했다. 수요가 주춤하는 사이 미리 늘려 놓은 생산능력은 부담으로 돌아왔다. 가동률이 떨어지고 재고가 쌓이면서 배터리 기업들은 이른바 캐즘의 한가운데에 놓였다.
2023년 당시 원재료 가격 급락도 충격을 키웠다. 전기차 수요 둔화와 공급 과잉으로 리튬과 니켈 가격이 떨어지면서 배터리 소재와 셀 판매가격도 동반 하락했다. 특히 양극재 업체들은 높은 가격에 확보한 원재료와 재고 가치가 떨어지면서 재고평가손실을 입었고, 판매량이 유지되거나 늘어도 판가 하락으로 매출과 수익성이 악화되는 상황을 겪었다.
길어지는 캐즘 속에서도 돌파구는 생겼다. ESS와 AI 데이터센터가 새로운 수요처로 떠오른 것이다. 전력망의 불안정성을 보완하고 AI 데이터센터에 안정적으로 전력을 공급하려면 대규모 배터리 설비가 필요하다. 전기차에 쏠려 있던 배터리 수요가 전력망과 데이터센터, UPS와 BBU 등으로 확장되기 시작했다.
국내 배터리 3사가 올해 2분기 나란히 흑자를 기록한 것도 이런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ESS 판매 확대와 AI 데이터센터 수요가 실적 개선을 이끌었다. 다만 이를 배터리 산업의 완전한 부활로 단정하기는 이르다. 북미 생산보조금과 관세 환급, 고객사 보상금 등 정책적·일회성 요인 상당 부분 작용했기 때문이다. 흑자 전환 자체보다 보조금을 제외하고도 안정적으로 이익을 낼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
ESS와 AI 데이터센터는 배터리 산업을 단숨에 구해낼 구세주라기보다 수요처를 넓혀주는 새로운 축에 가깝다. 전기차 시장의 회복이 지연되더라도 전력망과 데이터센터 시장에서 수익을 낼 수 있다면 배터리 기업의 체력은 한층 강해질 수 있다. 반대로 새로운 시장에서도 가격 경쟁력과 기술력을 확보하지 못하면 과거와 같은 기대만 반복될 가능성도 있다.
이차전지는 미래 산업이라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높은 평가를 받던 시기를 지났다. 이제 시장이 묻는 것은 성장 가능성이 아니라 실제 수익을 만들어낼 능력이다. 거품이 걷힌 자리에 남은 것이 진짜 경쟁력인지 확인하는 시험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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