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액주주가 추천한 이사가 이사회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이 넓어지고 있습니다. 오는 9월 10일부터 2차 개정 상법이 적용되면서, 자산총액 2조원 이상 상장회사는 주주가 집중투표를 청구하면 이를 시행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국 기업의 경우 30% 안팎의 지분으로 실질적 지배력을 행사하는 구조가 적지 않아 경영권 분쟁 상황에서 집중투표제가 중요한 변수가 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옵니다.
그런데 제도 시행을 앞두고 이사 수를 줄이거나 임기를 바꾸는 상장사들이 잇따르고 있습니다. 집중투표제 자체를 막을 수 없게 되자 이사회 구조를 손보는 방식으로 제도의 효과를 우회하려고 한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집중투표제는 이사를 여러 명 선임할 때 주주가 보유한 주식 수에 선임 예정 이사 수를 곱한 만큼 의결권을 행사하고 이를 특정 후보에게 몰아줄 수 있도록 하는 제도입니다. 가령 이사 5명을 뽑는다면 1만주를 가진 주주는 5만표를 갖게 되고 이를 한 후보에게 집중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소수주주 입장에서는 한 번에 선임하는 이사가 많을수록 특정 후보를 이사회에 진입시킬 여지가 커집니다. 집중투표제에서 이사 1명을 확보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 의결권은 선임 이사 수에 따라 1/(선임 이사 수+1) 수준으로 계산됩니다. 이사 6명을 선임한다면 약 14.3%의 의결권으로 1석을 확보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오는 식입니다.
반대로 이사회 정원을 줄이거나 매년 선임하는 이사 수를 제한하면 같은 지분을 가진 주주라도 집중투표를 통해 확보할 수 있는 이사 자리가 줄어들 수 있습니다. 제도 자체는 도입됐지만 실제 이사회 진입 문턱은 기업별 이사회 구성과 지분구조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이런 움직임은 올해 정기주총에서 나타났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효성중공업입니다. 회사는 올해 3월 정기주주총회에서 정관상 이사 수 상한을 기존 16명에서 9명으로 줄이는 안건을 추진했습니다. 국민연금은 이사 수 축소가 주주제안이나 집중투표제 청구 가능성을 약화시킬 수 있다며 반대했고 결국 해당 안건은 부결됐습니다. 다만 정관 변경안과 별개로 실제 이사회 규모는 기존 9명에서 7명으로 줄었습니다.
한진칼도 올해 정관상 이사 수 상한을 11명에서 9명으로 줄였습니다. 동시에 개정 상법에 따라 집중투표제 배제 조항은 삭제했습니다. 회사는 2020년 이후 경영권 경쟁과 아시아나항공 인수 등으로 이사회가 지나치게 커져 ‘이사회 규모의 합리적 정상화’가 필요했다고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집중투표제는 허용하면서 이사 수는 줄이는 구조가 됐습니다.
한화는 이사 수가 아닌 임기를 손봤습니다. 올해 한화·한화오션·한화에어로스페이스·한화엔진·한화비전·한화생명·한화투자증권 등 7개 계열사가 정관상 이사 임기를 조정했습니다. 이 가운데 한화생명은 사외이사 임기를 2년에서 3년으로 늘렸습니다.
이처럼 이사의 임기를 서로 달리하는 시차임기제 역시 집중투표제의 효과를 저하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한꺼번에 여러 명의 이사를 뽑는 대신 매년 일부 이사만 선임하는 구조가 되면 집중투표로 표를 몰아줄 수 있는 대상 자체가 줄어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올해 주총에서 이사회 관련 정관 변경안을 상정한 기업은 184곳이었고 이 가운데 15곳은 이사 수 상한을 축소했습니다. 이사 임기를 조정한 기업도 14곳에 달했습니다.
이처럼 집중투표제 도입을 둘러싼 상장사들의 우려가 뚜렷한 가운데, 집중투표제를 기업가치 제고의 기회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는 전문가 의견도 나옵니다.
엄수진 한화투자증권 연구원은 집중투표제가 의무화되면 기관투자자나 소액주주 연대가 추천하는 이사가 상장회사 이사회에 합류하는 사례가 늘어날 것으로 전망했습니다. 주주 추천 이사의 합류를 막기 어렵다면 이를 전향적으로 수용하고 주주와의 소통을 강화하는 것이 기업에도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설명입니다.
주주 추천 이사가 이사회에 들어오면 정기 주주총회에서 1년에 한두 차례 의결권이나 주주제안권을 행사하는 것보다 훨씬 가까운 거리에서 주주의 목소리를 회사에 전달할 수 있습니다. 특히 그동안 주주환원이나 기업가치 제고에 소극적이었던 기업이라면 주주 추천 이사의 선임을 계기로 시장의 관심이 높아진 상황에서 기업가치 제고 계획을 내놓거나 배당을 재개하는 등 변화의 의지를 보여줄 수도 있습니다.
이와 함께 JB금융지주를 사례로 꼽았습니다. JB금융지주에서는 2024년 정기주총에서 얼라인파트너스가 추천한 김기석·이희승 후보가 사외이사로 선임됐습니다. 당시 얼라인파트너스가 추천한 두 후보가 각각 1위와 2위를 차지했으며, 이들의 이사회 진입에는 집중투표제가 중요한 변수로 작용했습니다.
엄 연구원은 해당 사례에서 주주 추천 이사가 이사회에 진입한 이후 주주환원 정책 마련 등 회사의 즉각적인 변화가 나타났고, 2년 뒤에는 이들이 전원 연임에 성공했다는 점에 주목했습니다. JB금융지주 사례는 집중투표제가 단순히 소수주주의 ‘감시권’을 강화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 이사회 구성과 회사의 주주환원 정책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엄 연구원은 이 같은 주주 추천 이사가 이사회에 들어오면 정기 주주총회에서 1년에 한두 차례 의결권이나 주주제안권을 행사하는 것보다 훨씬 가까운 거리에서 주주의 목소리를 전달할 수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특히 주주환원에 소극적이었던 기업이라면 주주 추천 이사 선임을 계기로 기업가치 제고 계획을 내놓거나 배당을 재개하는 등 시장과 적극적으로 소통할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봤습니다.
결국 집중투표제가 시행된다고 해서 소액주주가 곧바로 이사회에 입성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회사가 이사 수를 줄였다고 해서 집중투표제가 무력화됐다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실제 주총에서 누가 몇 표를 확보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9월 이후 주주라면 회사의 집중투표제 도입 여부만 확인할 것이 아니라 이사회 정원과 실제 선임 이사 수, 이사 임기, 최대주주와 주요 주주의 지분구조를 함께 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주 추천 이사가 들어올 자리가 충분한지, 들어온 뒤 회사의 주주환원이나 기업가치 제고에 실제 변화가 있었는지도 살펴볼 만합니다. ‘소액주주 이사’가 정말 주주를 위한 자리가 될지는 제도보다 이를 받아들이는 회사와 주주들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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