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재우 경희대학교 교수]
그러나 이 대통령의 제안에 북한은 아직 묵묵부답이다. 이런 가운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한미 연합군사훈련을 축소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북한을 자극하지 않기 위한 조치라는 취지로 설명했다.
표면적으로 보면 한반도 평화와 북미·남북 대화의 분위기가 조성되는 듯하다. 그러나 북한의 최근 대외정책과 국제정세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면 상황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북한은 2024년부터 남한과의 관계를 ‘적대적 두 국가’ 관계로 공식화했다. 동시에 남북 간 대화와 교류에 대한 의지가 없다는 점도 분명히 했다. 특히 북한은 그해부터 국가의 공식 국호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대외적으로 강조하면서, 외국에서도 이를 정식으로 사용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통일부는 오는 9월 1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릴 예정인 동방경제포럼 참석을 추진하고 있다. 접촉과 교류를 통해 북한과의 평화공존을 모색하려는 업무 구상의 실마리를 러시아에서 찾으려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외교부 장관은 러시아 측과 조율된 사안이 없다면서, 설령 추진되더라도 이는 외교부 소관의 업무라는 취지로 선을 그었다.
한동안 국무회의에서 대북정책을 둘러싼 논쟁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듯했지만, 이 대통령이 광복절 경축사에서 다시 대북 접촉과 교류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분위기는 달라졌다. 이 대통령은 북한의 체제를 존중하고, 어떠한 형태의 흡수통일도 추구하지 않으며, 일체의 적대행위를 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제시했다. 그리고 이를 실천하기 위한 청사진으로 ‘평화공존’을 내세웠다. 나아가 정전 체제를 평화 체제로 전환하고 종전을 논의하겠다는 의지도 밝혔다.
트럼프의 훈련 축소가 의미하는 것
이 같은 분위기를 더욱 고무시킨 것은 다음 날인 8월 16일 트럼프 대통령이 미 국방장관에게 한미 연합군사훈련 축소를 지시했다는 소식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 위원장과의 우호적 관계를 이유로 북한을 자극하지 않기 위한 조치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 결정의 배경을 단순히 북한과의 관계 개선 의지로만 해석해서는 안 된다. 미국은 우크라이나 전쟁 지원과 이란 관련 분쟁 등으로 군수물자의 재고와 생산능력에 상당한 부담을 받고 있다. 패트리엇 미사일을 비롯해 화약과 탄약, 각종 군수물자를 보충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런 상황에서 대규모 한미 연합훈련을 축소하는 결정은 미국의 군사적 부담을 줄이려는 현실적인 판단과도 연결해 볼 수 있다.
한미 연합훈련에 대한 트럼프 대통령의 불만은 외교적·경제적 문제와도 무관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한국의 대미 투자 문제나 쿠팡 사태 등을 둘러싼 양국 간 현안이 원만하게 풀리지 않는 상황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안보 문제를 통해 우회적으로 불만을 표출했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한미 연합훈련에 대한 트럼프 대통령의 불만은 외교적·경제적 문제와도 무관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한국의 대미 투자 문제나 쿠팡 사태 등을 둘러싼 양국 간 현안이 원만하게 풀리지 않는 상황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안보 문제를 통해 우회적으로 불만을 표출했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따라서 트럼프 대통령의 대북 발언만을 근거로 북미 정상회담이나 남북미중 4자회담 개최 가능성을 지나치게 낙관해서는 안 된다.
북한은 여러 차례의 시정연설을 통해 남한과 대화할 의사가 없다는 입장을 비교적 일관되게 밝혀왔다. 따라서 현재 북한의 태도를 고려하면 남북대화나 4자회담을 성사시키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북미대화 역시 마찬가지다. 북한이 대화의 전제조건으로 사실상 핵보유국 지위의 인정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이 이를 받아들이기는 아직 쉽지 않다. 만약 미국이 북한의 핵보유국 지위를 사실상 인정한다면, 북미협상의 의제는 비핵화가 아니라 핵군축이나 핵감축 문제로 전환될 가능성이 크다. 미국이 북한의 핵무기와 자신의 핵무기를 놓고 흥정하는 상황을 받아들이기는 어려울 것이다.
더 중요한 문제는 북한이 2024년 ‘적대적 두 국가’ 관계를 공식화한 이후 대남정책의 구조 자체를 바꾸었다는 점이다.
북한은 외교 업무와 관련된 조직과 인사들에게 대한민국 국적자와의 접촉을 가급적 차단하고, 남한 자금이 투입되는 사업이나 행사에도 참여하지 않도록 하는 방향의 지침을 내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필자와 같은 일개 교수에게까지 이런 이야기가 들릴 정도라면, 우리 정부의 관련 부처가 이를 모를 리 없다.
그럼에도 우리가 북한의 변화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우리의 감성과 의지만 앞세워 북한의 문을 계속 두드린다면, 오히려 북한이 우리를 더욱 외면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북한 외교의 변화를 주목해야
그렇다고 북한과 조우할 기회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그 기회를 제대로 준비하는 일이다.
예로부터 ‘첫 단추를 잘 끼워야 한다’고 했다. 우리가 북한과의 접촉 자체에 지나치게 집착할수록 오히려 접촉의 가능성이 줄어들 수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북한을 향해 무조건 손을 내미는 것이 아니라, 북한의 외교정책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를 면밀하게 분석하는 일이다.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북한의 다극화 국제질서에 대한 인식이다.
북한은 코로나19 위기가 진정되기 시작한 이후 국제정세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보이기 시작했다. 국제질서가 다극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기 때문에 다자외교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인식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북한은 2022년 이후를 ‘다극 세계의 실현 시기’로 규정하고 있다. 북한의 표현을 빌리면 국제사회에는 다극화를 향한 ‘활력 있는 흐름’이 형성되고 있으며, 그 중심에 브릭스(BRICS)와 상하이협력기구(SCO)가 있다는 것이다.
북한이 글로벌 사우스로 향하는 이유
중국과 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다극화 질서 구축에 동참하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한 북한은 자연스럽게 글로벌 사우스로 외교의 시야를 넓히고 있다. 이 과정에서 북한은 다자외교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2024년에는 외교 대상 국가의 우선순위를 제시하는 모습도 나타났다. 김정은은 최고인민회의 제14기 제10차 회의 시정연설에서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관계 발전을 우선시하겠다고 밝혔다. 그다음은 자주와 정의를 지향하는 ‘모든 나라’이며, 마지막으로 북한을 존중하고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자본주의 국가를 대상으로 제시했다.
브릭스 외교에서 나타난 북한의 특징
북한의 글로벌 사우스 외교에서 특히 주목할 점은 국제기구나 다자협의체의 의장국에 따라 북한의 외교 활동이 크게 달라진다는 사실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브릭스다.
북한이 2024년 브릭스가 주관한 회의에 참여할 수 있었던 데에는 당시 의장국이 러시아였다는 점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북한의 첫 브릭스 관련 회의 참석은 2024년 6월 러시아 타타르스탄 공화국 수도 카잔에서 열린 브릭스 플러스 체육상 회의였다.
이를 같은 해 6월 푸틴 대통령의 방북을 계기로 체결된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 관계 조약’의 실천적 결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조약 제7조에는 양국이 상호성에 기초해 각국이 국제·지역기구에 가입하는 것을 협조하고 지지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런 점에서 북한의 브릭스 관련 회의 초청에는 러시아의 역할이 상당히 컸다고 볼 수 있다.
북한의 두 번째 브릭스 관련 회의 참석은 9월에 이루어졌다. 최선희 외무상은 9월 18일부터 20일까지 열린 브릭스 제1차 여성포럼에 참석해 북한의 대외정책을 소개했다. 그는 한반도 안보 위기의 책임을 미국과 그 동맹세력에 돌리는 한편, 서방 중심의 국제질서에 맞서 브릭스와 러시아가 추진하는 움직임을 적극 지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의장국이 바뀌자 북한의 브릭스 관련 활동도 눈에 띄게 줄었다. 2025년 의장국이 브라질로, 올해 의장국이 인도로 바뀌면서 북한을 초청하는 동력이 약해졌기 때문이다.
이는 북한의 다자외교가 아직 독자적인 영향력을 확보했다기보다는 중국과 러시아 등 우호국의 외교적 지원과 해당 다자기구의 의장국 정책에 상당 부분 의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올 하반기와 내년이 중요한 이유
북한의 다자외교 행보는 올 하반기부터 내년까지 다시 활발해질 가능성이 있다.
우선 오는 9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리는 동방경제포럼에 북한이 직접 참석할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인다. 다자 경제회의에서 북한이 얻을 수 있는 외교적·경제적 이익은 적지 않지만, 현재 북한이 제공할 수 있는 실질적인 경제협력의 공간은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히려 2023년과 같이 김정은이 블라디보스토크를 개별적으로 방문해 푸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는 시나리오가 더 현실적일 수 있다.
또한 북한이 최근 다자주의와 다자외교, 다극화 국제질서 구축에 대한 관심을 지속적으로 표명하고 있는 만큼, 올가을 중국이 개최하는 슝안(雄安) 글로벌 거버넌스 포럼에 북한이 초청될지도 관심 있게 지켜볼 필요가 있다. 이 과정에서 북중러 3국 간 회동이 이루어질 가능성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내년에는 아세안 관련 다자회의에서 북한의 외교 활동이 다시 활발해질 가능성이 있다. 의장국이 싱가포르이기 때문이다.
북한은 지난해 의장국이 말레이시아였고 올해는 필리핀이어서 아세안 관련 외교 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기 어려웠다. 말레이시아와는 2021년 김정남 암살 사건 이후 외교관계가 단절된 상태이고, 필리핀 역시 미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중국과의 관계가 악화되고 있어 북한과의 관계 역시 순탄치 않다.
반면 싱가포르는 최근 북한 문제에 상당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특히 경제협력과 인도주의 지원 차원에서 북한과의 협력 가능성을 모색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변화와 맞물려 최근 주싱가포르 북한대사관의 인적 쇄신도 이루어졌다. 북한 외무성에서 아시아 담당 부상을 역임한 리길성이 대사로 부임한 것은 전례에 비춰볼 때 상당히 높은 위상의 인사로 평가할 수 있다. 또한 북한은 경제 분야 담당 인사를 싱가포르에 처음 파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움직임은 북한이 싱가포르를 비롯한 아세안 지역과의 관계를 다시 확대하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내년부터 싱가포르가 북한을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을 비롯한 아세안 관련 다자회의에 초청할 가능성이 있다면, 우리에게도 북한과 자연스럽게 조우할 기회가 생길 수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조급함’이 아니라 준비다
결국 중요한 것은 북한과의 접촉 자체가 아니다. 북한이 변화한 환경과 외교전략을 정확하게 이해한 뒤,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북한과 만날 것인가를 준비하는 일이다.
현재 북한은 남북관계를 ‘적대적 두 국가’ 관계로 규정하고 있다. 남한과의 대화에는 문을 닫아둔 반면, 중국·러시아와의 전략적 협력을 강화하고 다극화 국제질서에 적극적으로 편승하고 있다. 동시에 글로벌 사우스와의 다자외교를 통해 국제적 활동 공간을 넓히려 하고 있다.
이런 북한에게 남북대화만을 반복적으로 제안한다고 해서 북한이 곧바로 호응할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북한이 관심을 갖고 있는 다자외교의 공간과 국제정세의 변화 속에서 우리가 북한과 만날 수 있는 접점을 찾는 것이 현실적인 접근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 열릴 아세안 관련 다자회의나 중국·러시아가 주도하는 국제회의는 중요한 기회가 될 수 있다. 우리가 북한을 만나기 위해 애써 찾아가는 방식보다, 북한이 자연스럽게 참여하는 국제무대에서 우리도 차분하게 만나고 대화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일 수 있다.
첫 단추를 잘 끼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조급함을 버려야 한다. 북한이 우리의 제안에 당장 응답하지 않는다고 해서 더 강한 메시지를 보내거나 접촉을 서두를 필요도 없다.
남북관계에서 기회는 언제든 찾아올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 기회가 왔을 때 우리가 준비되어 있느냐는 것이다. 북한의 다극화 외교와 글로벌 사우스 외교를 면밀하게 분석하고, 중국·러시아·아세안 등 북한이 활동하는 국제무대에서 우리의 외교적 공간을 넓혀가는 것이 그 준비의 첫걸음이 되어야 한다.
주재우 필자 주요 이력
▷미국 웨슬리언대 정치학 학사 ▷베이징대 국제정치학 석박사 ▷한국국가전략연구원 중국연구센터장 ▷브루킹스연구소 방문연구원 ▷미국 조지아공과대학 Sam Nunn School of International Affairs Visiting Associate Profess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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