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를 삶의 한계가 아닌 창작의 원동력으로 승화시켜 온 예술인들이 올해 한국 장애예술계를 대표하는 문학상과 미술상을 수상하며 깊은 감동을 전하고 있다. 시력을 잃은 뒤에도 삶과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시로 담아온 박성진 시인과 소아마비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독학으로 자신만의 화풍을 완성한 김원서 화가가 각각 2026년 구상솟대문학상과 이원형어워드의 주인공으로 선정됐다.
(사)한국장애예술인협회(대표 석창우)는 2026년 제36회 구상솟대문학상과 제9회 이원형어워드 수상자를 발표했다. 올해 구상솟대문학상은 시인 박성진(40·시각장애), 이원형어워드는 서양화가 김원서(63·지체장애) 작가에게 돌아갔다.
구상솟대문학상은 장애예술인의 문학 창작 의욕을 높이고 문학적 성취를 격려하기 위해 제정된 권위 있는 문학상으로, 장애문학 분야를 대표하는 상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이원형어워드 역시 장애예술인의 창작활동을 지원하고 예술적 성과를 널리 알리기 위해 마련된 미술 분야의 대표적인 상이다.
올해 제36회 구상솟대문학상 심사위원회는 박성진 시인의 작품 ‘포도넝쿨이 덮은 집’을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이번 공모는 31대 1이라는 높은 경쟁률을 기록한 가운데 심사위원인 김재홍 가톨릭대학교 교수와 맹문재 안양대학교 교수, 이승하 중앙대학교 교수가 모두 박 시인의 작품에 최고점을 부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심사위원장을 맡은 안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맹문재 교수는 “박성진 시인의 작품은 서정성과 뛰어난 묘사력을 작품의 구성으로 자연스럽게 통합해 완성도가 매우 높다”며 “인간의 가치를 향한 주제의식이 구체성을 갖추고 있어 독자들에게 깊은 감동을 전한다”고 평가했다.
수상작인 ‘포도넝쿨이 덮은 집’은 폐허가 된 시골집을 뒤덮은 포도넝쿨의 이미지를 뇌종양으로 기억을 잃어가는 한 사람의 삶과 연결해 생명과 기억, 상실과 희망을 깊이 있게 그려낸 작품이다.
시는 포도넝쿨이 빈집을 뒤덮는 풍경에서 출발하지만, 점차 암세포가 뇌를 잠식하는 모습을 겹쳐 보여주며 인간이 겪는 고통과 상실의 과정을 섬세하게 표현한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병실 창가를 비추는 별빛과 등불의 이미지를 통해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으려는 의지를 담아내며 독자들에게 깊은 울림을 선사한다.
박성진 시인의 삶 또한 작품만큼이나 깊은 감동을 전한다.
그는 망막색소변성증으로 어린 시절부터 시력이 점차 약해졌고, 순천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 재학하던 중 완전히 시력을 잃었다. 이후 새로운 삶을 준비하기 위해 맹학교 고등부에 진학해 점자와 안마기술을 익혔으며 안마사로 활동했다.
끊임없는 노력 끝에 2018년 장애인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그는 현재 전남 광주통합특별시 광산구청 소속 8급 공무원으로 근무하며 광산구장애인종합복지관에 파견돼 공직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삶의 어려움을 이겨낸 경험은 그의 작품 세계에도 깊게 녹아 있다. 인간의 존엄과 생명의 소중함, 희망의 가치를 꾸준히 시로 표현하며 장애문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박성진 시인은 수상 소감에서 “구상 선생님의 이름이 새겨진 이 상을 더욱 무겁게 여기며 저와 저를 둘러싼 이 세계를 더욱 깊이 들여다보는 시인이 되겠다”고 밝혔다.
구상솟대문학상은 고(故) 구상 시인이 지정기탁한 2억원의 기금으로 운영되며, 수상자에게는 상금 500만원과 함께 도서출판 연인M&B의 후원으로 개인 시집 출간의 기회도 제공된다.
2026년 제36회 구상솟대문학상 수상작
포도넝쿨이 덮은 집
박성진
포도넝쿨이 집을 덮고 있다
잿빛 시멘트 바닥인 마당 한 켠에서 뻗어 나와
새하얀 담장을 휘감아 덮고 있다
구두 한 켤레 놓여 있을 섬들이 온데간데없다
녹슬어버린 자물쇠가 채워져 있을 현관문도
붉은 커튼 드리워져 있을 창문도 보이지 않는다
넝쿨손은 집 한 채를 통째로 밑거름 삼아
양철 지붕마저 덮어버렸다 시퍼렇게 덮고서는
아직도 뭔가 부족하다는 듯 뻗어나가는
저승사자 같은 것들
집안 곳곳에 배인 추억들마저 삼켜버릴 작정인가
어디서부터 뻗어 나온 것인지 알 수 없는 암세포줄기 탓에
엠알아이에 찍힌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흑빛이었다
둥글게 부풀어 오른 뇌종양들
그녀의 기억들을 썩은 두엄쯤으로 여기고 있는 것일까
어두운 그늘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흡수된 좌뇌에 이어
새하얗던 중뇌마저 까맣게 자취를 감춰 버렸다
몇 번인가 툭
포도송이 그 까만 알들 떼어내듯 종양들을 잘라보지만
소용없다 끊임없이 자라는 넝쿨손들
힘겹게 남아있는 우뇌마저 덮어버릴 기세로 뻗어 나오는 것이다
포도넝쿨이 덮어버린 집이라니!
저 넝쿨손들 다 걷어내면
굳게 잠겼던 자물쇠 스르르 풀릴 것만 같아
그녀의 머릿속에서 생생히 썩어가는
환한 등불이 되고 싶은 밤
자꾸만 병실을 기웃거리던 머리털자리 별 하나
반들반들한 머리 위로 금세라도 떨어질 듯 창가에 바짝 붙어
새하야니 빛나고 있다
미술 분야인 제9회 이원형어워드는 서양화가 김원서 작가가 수상했다.
김 작가는 생후 7개월 무렵 소아마비를 앓아 왼쪽 다리에 장애를 갖게 됐지만 어린 시절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며 예술에 대한 꿈을 키워왔다.
젊은 시절에는 상업 그림을 그리며 활동했지만 1990년대 이후 관련 시장이 축소되면서 직장생활을 이어갔고, 정년퇴직 이후 다시 붓을 잡으며 본격적인 창작 활동에 몰두했다.
그는 미술대학이나 전문 교육기관에서 정식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 대신 전국의 미술관과 전시장을 찾아 다양한 작품을 감상하며 스스로 화법을 익혀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구축했다.
이원형어워드 심사위원장을 맡은 성산효대학원대학교 박현희 교수는 수상작 ‘비상’에 대해 “주제의 일관성과 화면 구성의 안정성이 돋보이며 자연 이미지를 통해 개인의 내면과 삶의 태도를 확장하고 있다”며 “꿈과 희망을 향해 날아오르려는 상승의 의지가 인상적으로 표현된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김원서 작가는 “너무나 큰 상을 받게 되어 당혹감과 기쁨이 함께 밀려온다”며 “아직 부족한 제가 받아도 되는지 걱정이 앞서지만 앞으로 더욱 좋은 작품으로 보답하겠다”고 겸손한 소감을 전했다.
이원형어워드 심사는 김미경 홍익대학교 교수와 박현희 성산효대학원대학교 교수, 석창우 수묵크로키 화가가 맡았으며, 상금 200만 원은 고(故) 이원형 작가의 유족이 매년 후원하고 있다.
이번 수상은 장애를 예술적 가능성의 한계로 보지 않고 삶을 향한 치열한 의지와 창작 열정으로 승화시킨 예술인들의 노력이 다시 한번 인정받았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문학과 미술이라는 서로 다른 분야에서 활동해 온 두 예술인은 자신의 삶을 작품으로 승화시키며 많은 이들에게 희망과 용기, 그리고 예술이 가진 치유의 힘을 전하고 있다.
장애예술은 이제 장애를 소재로 한 표현을 넘어 인간과 사회, 생명과 희망을 이야기하는 중요한 문화예술 영역으로 성장하고 있다. 올해 수상자들의 작품 역시 장애를 뛰어넘어 모든 이들이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 가치와 인간애를 담아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한편, (사)한국장애예술인협회는 앞으로도 장애예술인의 창작 활동을 적극 지원하고 우수한 작품을 지속적으로 발굴해 우리 사회에 장애예술의 가치와 문화적 다양성을 널리 확산해 나갈 계획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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