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 자본과 조직, 고도의 전문성, 그리고 방대한 정보를 가진 금융회사에 비해 그 소비자는 비교조차 불가능한 '정보 비대칭'의 극단적 구조에 놓여 있다. 다른 상품과 달리 금융상품에 관해 소비자를 적극적으로 보호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금융소비자보호법은 그 취지에서 금융회사가 준수해야 할 '적합성 원칙', '적정성 원칙', '설명의무' 등을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소비자 보호를 위해 마련한 원칙들이 현실에서는 다른 결과로 나타나는 것을 목도한다. 원칙을 구현하는 구체적인 방안들이 오히려 소비자가 아니라 금융회사를 보호하고, 소비자의 목을 죄는 덫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이른바 '투자자 보호 수단의 역설'이다.
금융회사는 적합성 원칙 실현의 수단으로 상품 판매 과정에서 투자자 성향 설문조사를 한다. 소비자의 금융지식 수준, 투자 경험, 손실 감수 의사 등을 체크하도록 한다. 설명의무를 이행했다는 증거로 위험성을 인식했다는 자필 기재를 받으며, 판매 절차를 재확인하는 '해피콜(Happy Call)' 제도를 운영한다. 본사 상담원이 전화로 투자자에게 핵심 내용을 다시 고지하고 이해 여부를 묻는 방식이다.
하지만 상품 판매의 실제 현장에서는 이 제도들이 연극적으로 소비된다. 설문조사 때 판매 직원은 고위험 상품을 판매할 수 있는 등급이 나오도록 소비자가 체크해야 할 문항을 지시해 준다. 설명의무 실현 수단 역시 형식적인 통과 의례가 된다. 서류의 복잡한 경고는 “안전한 상품”이라거나 “형식적인 서류”라는 직원의 친절한 설명에 쉽게 무력화된다. 상품의 위험성을 제대로 알았든 아니든 설명을 들었으니 소비자는 직원의 요구에 따라 "설명 들었음", "이해했음"이라고 기재한다. 해피콜 역시 마찬가지다. 직원은 가입을 마치며 "본사 확인 전화는 형식적인 절차일 뿐이니 그저 '예'라고만 답하라"고 사전에 철저히 안내한다. 신뢰를 쌓아온 직원의 말을 믿고 이미 투자를 결심한 소비자에게 해피콜의 기계적 질문들은 경각심을 주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소비자에게 부적합한 상품이 위험성에 대한 이해 없이 판매되었음에도, 금융감독당국이 요구하는 서류와 녹음은 금융회사의 손에 고스란히 쥐어진다. 이 과정을 거치고 나면 금융 문외한인 투자자도 서류와 녹음상으로는 어느새 고위험 상품을 완벽히 이해하고 고수익을 원해서 가입한 '탐욕스러운 전문 투자자'로 둔갑한다.
소비자가 인식한 위험과 실제 위험이 다르기에 결국 감추어진 위험은 실현된다. 제대로 설명되지 않은 위험으로 발생한 손해를 배상 받기 위해 소송을 제기하지만 금융회사는 판매 당시에 촘촘하게 받아둔 서류와 해피콜 녹취록을 증거로 제출한다. 그 자료들 속에서 소비자는 더 이상 피해자가 아니라, 원본 전액 손실의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높은 이익을 노린 탐욕적인 자산가로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진실을 밝히는 것은 오롯이 소비자의 몫이지만, 그 손에는 직원의 실제 행위를 입증할 방법이 없다. 손실을 대비해 소비자가 미리 대화를 녹음해 둘 리 없고, 금융회사 유선 전화와 달리 직원 개인 휴대전화 통화나 대면 대화는 기록에 남지도 않는다. 법원은 결국 금융회사가 제출하는 서류와 녹음을 바탕으로 판매 과정에 문제가 없었다는 판단을 내린다.
투자자 보호 수단을 서류로 남기도록 하는 방식이 결국 이런 역설을 낳는다. 지난해 금융감독 당국은 불완전판매 예방 대책을 내놓았다. 금융회사 성과보상체계(KPI) 개선의 경우 적절한 방안이 될 수 있으나, '부적정성 판단보고서' 작성 등 나머지 서류 중심의 대책은 자칫 형식적 절차를 한 겹 더 얹어 투자자 보호가 아니라 금융회사의 면책용 방패를 더 강화하는 것에 머물 수 있다.
인간의 인지능력은 깨알 같은 글씨의 어려운 서류보다 친분이 쌓인 담당 직원의 말을 더 신뢰하도록 되어 있다. 직원이 과거의 안정적 수익을 자랑하며 안심시키는 상황에서, 미래의 막연한 위험을 경고하는 서류 뭉치는 소비자의 위험 인식을 깨우는 데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한다. 아무리 합리적인 소비자라도 정보 비대칭과 심리적 밀착 앞에서는 무력해지기 쉽다.
실효적인 소비자 보호를 위해서는 서류 중심의 면책성 규제에서 벗어나야 한다. 금융회사 보상 체계(KPI)를 판매 실적이 아니라 '고객 수익률'이나 '민원 발생률' 중심으로 개편하는 것이 필요하다. 최소한 고위험상품의 경우 소송에서 '적합성원칙 준수', '소비자의 이해 정도' 등 불완전판매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금융회사가 입증하도록 입증책임을 전환해야 한다. 판매 과정을 서류가 아니라 현장에서 오간 날것의 대화로 기록하도록 하고, 선택적 기록 사실이 발견될 경우 그 자체로 책임을 부담하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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