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혁 칼럼니스트]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첨단 대한민국, 모범적 민주국가 대한민국, 이 모든 걸 한순간에 깡그리 망가뜨렸다."
6·3 지방선거에서 발생한 투표용지 부족 사태를 두고 이재명 대통령이 취임 1주년 기자회견에서 한 말이다. 통합의 언어에 인색한 탓에 그다지 경청하지 않던 이 대통령의 말이 모처럼 귀에 쏙 들어왔다. 나는 책임이 없다는 듯한 유체이탈 화법이 살짝 거슬리기는 하지만 말이야 옳은 말 아닌가. 전세계 젊은이들이 동경하는 매력 국가 대한민국에서 투표용지가 바닥나 투표가 중단되다니! 이 땅에 민주화가 도래한지 39년이 지났는데 전국 주요 대학 총학생회뿐만 아니라 고등학생들까지 민주주의를 걱정하는 시국선언문을 발표하는 걸 보게 될 줄이야!
투표할 의사가 있는데도 선거관리상의 문제로 투표를 못했다면 참정권이 침해당한 것이다. 투표 마감 시간인 오후 6시를 넘겨 지상파 방송사 출구조사 보도를 접한 후 투표를 했다면 공정성이 훼손된 것이다. 참정권이 침해당하고 공정성이 훼손된 선거를 선거라고 부를 수는 없다. 기회와 절차의 공정에 민감한 2030 세대의 분노가 폭발한 이유다. 이를 두고 '앵그리 2030'의 선전포고란 분석이 나왔다. 1956년 존 오즈번의 희곡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Look Back in Anger)'가 세상에 나온 이후 '앵그리 영맨'은 기성세대의 위선에 분노하는 청년문화를 상징하는 말이 되었다. 분노한 2030들은 잠실 참정권 집회에 집결했고, 전문가들은 이들을 일러 '소셜 시티즌'이라고 명명했다. 소셜 시티즌(Social Citizen)은 소셜미디어(SNS)로 정보를 공유하고 사회·정치적 이슈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시민을 뜻한다. 이 대통령이 선거관리위원회를 비판하면서 2030의 문제 제기를 콕 집어 상찬한 데에는 여론의 동향을 감지하는 남다른 촉이 작동했을 것이다.
진상규명 작업이 진행될수록 선거관리 과정 곳곳에서 드러나는 총체적 부실과 무능으로 인해 선관위의 신뢰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선관위의 말은 이제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기 어려울 지경이다. 이 와중에 사무실에서, 그것도 근무시간에 골프 스윙 연습하는 대구 선관위 6급 직원의 모습이 카메라에 포착됐다. 무너진 조직 기강의 상징으로 오래 기억될 장면이다. 때로는 사진 한 컷이 백 마디 말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해 준다.
만기친람하는 평소와 달리 강 건너 불 보듯 하던 이재명 대통령이 나흘이나 지나서야 검경 합수본을 구성하라고 지시했지만, 논란이 일자마자 즉각 거친 언사로 분노를 감추지 않던 스타벅스 탱크데이 사태 때와 비교하면 온도차가 크다. 설마 국민의 참정권이 커피보다 덜 중요하다고 생각해서일까? 한 유명 좌파 유투버가 "일베를 탱크로 밀어버려야 한다"는 망언을 하여 탱크 울렁증이 있는 국민들의 가슴을 철렁하게 했는데도 대통령은 가타부타 말이 없다. 한 네티즌의 일침처럼 착한 탱크, 나쁜 탱크가 따로 있나? 대통령의 '선택적 분노'에 대해 궁금해 할 국민이 많을 것 같다. 대통령의 격한 분노에 호응하며 스타벅스 불매 운동에 앞장설 만큼 정의감이 넘치던 분들은 다 어디 갔나. 응당 시국 선언이 줄을 잇고 선관위 앞에서 밤샘 연좌농성이라도 해야 마땅하건만 이렇다 할 움직임이 없는 것도, 특검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과시하며 지난 일년 동안 5개의 특검을 밀어붙인 민주당이 정작 선관위 특검엔 시큰둥한 것도 참 궁금한 일이다.
선거관리위원회의 문제는 비단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2022년 대선 때는 소쿠리 투표로, 2023년에는 친인척 특혜 채용으로 논란을 빚었고, 2024년에는 재외선거율을 부풀려 해외출장 예산을 과대 확보하는 비리를 저질렀고, 작년 대선 때는 신촌 투표소에서 투표용지가 외부로 반출되는 사고가 있었다. 여론의 호된 질타를 받을 때마다 선관위는 뼈를 깎는 혁신을 약속했지만 그저 말뿐이었다. 선거가 있기에 존재하는 조직에서 막상 선거철이 돌아오면 어김없이 휴직이 급증하는 기현상은 선관위의 존재이유를 의심케 한다. 이들에게는 선거철이 곧 휴가철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관리하는 선거에서 아무런 사고가 나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투표용지 부족 사태는 '예고된' 참사였다.
고대 중국의 주나라는 제사 풍습이 독특했다. 제사를 지낼 때 죽은 조상의 영혼이 후손의 몸을 빌려 음식을 먹는다고 믿어 문중의 어린아이를 제상 앞에 앉혔다. 이 아이를 '시동(尸童)'이라 불렀고 아이가 앉아 있는 자리를 '시위(尸位)'라고 했다. 아이는 그저 조상을 대리하여 시위에 앉아 있는 덕분에 온갖 음식을 받아먹었다. 《시경》에 처음 등장하는 '소찬(素餐)'은 '공짜 밥 또는 국가의 녹봉을 공짜로 받아먹는 것'을 말한다. 탐욕스러운 자가 하는 일 없이 국록을 축내고 어진 자가 벼슬길에 나서지 않는 세태를 풍자한 시 '위풍(魏風) 벌단(伐檀)편'의 "저 군자여, 공짜 밥을 먹지 않는구나!(彼君子兮, 不素餐兮!)"라는 구절에서 유래했다.
훗날 전한 성제(成帝) 때 강직한 지방 현감 주운(朱雲)이 국정을 농단하는 황제의 최측근 장우(張禹)를 가리켜 '시위소찬하는 간신'이라고 직격한 이래 시위와 소찬을 결합한 '시위소찬(尸位素餐)'은 실력과 책임 없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일은 하지 않으면서 권한과 혜택만 누리는 관료 사회의 무능과 나태를 통렬하게 꾸짖는 성어로 자리잡았다.
선관위는 이번 6·3 지방선거에 대비해야 한다며 선거관리 예산을 늘려 받고는 절반도 집행하지 않았다. 그만큼 할 일을 안 했다는 얘기다. 반면에 자신들이 받을 성과급 예산은 매년 칼같이 집행했다. 중국에서 유래한 '철밥통(鐵飯碗)'이라는 단어가 있다. 해고될 염려가 없는 국영기업체 직원을 이르는 말이다. 철밥통으로 불릴지언정 그들은 밥값은 했다. 과오가 있으면 응당한 처벌을 받았다. 헌데 선관위 직원들은 밥값을 하기는커녕 선거 때마다 사고를 치고도 변변한 징계조차 받지 않고 성과급까지 챙기니 철밥통이 부럽지 않은 신의 직장 아닌가. 헌법기관이라는 신줏단지(尸位) 뒤에 숨어, 책임은 지지 않고 권한과 혜택(素餐)만 누리는 선관위는 시위소찬의 전형이다. 무능하고 무책임하고 무치, 즉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3무' 선관위가 국민의 인내심을 시험하고 있다.
작년 3월 기고한 본고 38회차에서도 선관위를 언급하며 "국민의 눈에 선관위는 대수술이 필요한 중증 환자일 뿐"이라고 진단했다. 그로부터 일년 수개월이 지났지만 선관위는 달라진 게 없다. 오직 하나, 대통령의 '밥 친구'라는 위철환 변호사를 중앙선관위 상임위원으로 앉힌 것 말고는. 상임위원은 위원장 포함 9명의 위원 중 유일한 상근직으로, 장관급 예우를 받으며 사무처의 사무를 감독하고 위원회의 의사결정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실권자다. 이번 사태의 책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위 위원이 사퇴한 위원장 직무대행을 하며 진두지휘하는 셀프조사를 과연 얼마나 믿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선관위는 수술 시기를 놓친 중증 환자요, 고쳐 쓸 수 없는 집이다. 서까래도 기둥도 대들보도 다 썩었다. 전면 해체, 전면 물갈이가 답이다. 다시 이재명 대통령의 어록을 인용해야겠다. 지난 7일 SNS에 올라온 글이다.
"국민의 신뢰를 잃은 독립기관은 존재의 의미가 없다."
유재혁 필자 주요 이력
△연세대 사회학과 졸업 △제일기획 근무(1985~2008) △'한국산문' 등단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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