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는 지금 세 가지 구조적 위기에 동시에 직면해 있다. 첫째는 잠재성장률의 추락이다. 지난 4월 OECD는 한국의 잠재성장률이 지난해 1.92%에서 올해 1.71%, 내년에는 1.57%로 하락할 것으로 전망했다. KDI는 인구구조 변화로 인해 이 하락세가 지속되어 2040년대에는 0% 내외까지 떨어질 것으로 내다본다. 저출생·고령화로 노동투입이 한계에 부딪힌 상황에서 성장률을 끌어올리는 유일한 경로는 자본투자 확대와 총요소생산성(TFP) 향상뿐이다. 둘째는 낙수효과의 소멸이다. 노동생산성 증가율과 실질임금의 격차가 지속적으로 벌어지면서 기업성장이 소득증가로, 소득증가가 소비 확대로 이어지는 선순환이 작동을 멈추었다. 셋째는 첨단산업 패권 경쟁의 격화다. UN 통계에 따르면 한국의 세계 상품 수출 비중은 3.2%로 정점을 찍은 후 하락세를 이어가고 있다. 로봇·자율주행을 앞세워 기술강국으로 전환하는 중국, AI와 우주항공산업에서 도약하는 미국을 우리가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생산적 금융은 이 구조적 위기에 대한 해법이다. 금융이 부동산의 달콤한 유혹에서 벗어나, 담보와 단기 수익 중심의 기존 방식을 넘어 기업의 기술력·사업 구조·중장기 성장 가능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자금을 공급하는 방향으로의 전환이 불가피한 이유다.
정부는 이 위기에 5년간 150조원 규모의 국민성장펀드로 응답했다. 정부보증채권 75조원과 민간·금융권 자금 75조원을 결합해, 직접 지분투자·간접투자 정책펀드·인프라 투융자·초저리 대출의 네 가지 방식으로 반도체·AI 등 10대 첨단전략산업 90개 기술에 자금을 공급한다. 2025년 12월 출범 이후 신안우이 해상풍력, 평택 삼성전자 AI 반도체 생산기지 등에 투자를 승인했고, 일반 국민을 대상으로 한 국민참여성장펀드는 출시 5일 만에 6000억원이 완판되며 시장의 뜨거운 호응을 확인했다.
사모펀드와 벤처캐피털은 전형적인 모험자본으로, 유형자산 담보가 아닌 기업의 성공 가능성을 보고 장기적으로 투자하는 인내자본이다. 자본시장연구원이 회수 완료된 231개 투자 건을 분석한 결과, 사모펀드는 도입 이후 기업가치를 제고하면서 자본시장을 통한 기업 구조조정의 핵심 수단으로 자리매김했으며, 전체 M&A 시장에서의 비중은 거래 건수 및 금액 기준으로 약 50%에 달한다. 벤처캐피털은 2024년 한 해에만 4697개 기업에 11조9000억원을 투자해 역대 최대 피투자 기업 수를 기록했다. 그러나 문제는 지금의 사모펀드·벤처캐피털 생태계가 국민성장펀드가 요구하는 역할을 감당하기에 구조적으로 취약하다는 점이다.
사모펀드는 2024년 말 기준 약정액 153.6조원 규모로 성장했지만, 자금이 소수 대형사에 집중돼 있고 2024년 투자 집행 규모는 전년 대비 25.8% 감소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종합금융투자사업자의 모험자본 공급 의무 이행 실적에서 기관전용 사모펀드가 제외돼 있다는 점이다. 5대 증권사가 향후 3년간 공급해야 할 모험자본이 20조4000억원에 달하지만, 사모펀드에 투자해도 그 실적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혁신기업에 자금을 공급해온 민간 모험자본이 생산적 금융 제도 밖에 방치돼 있는 것이다.
벤처캐피털의 현실은 더욱 어렵다. 대한상공회의소가 113개 벤처캐피털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62.8%가 자금 조달이 어려워졌다고 답했고, 정책금융 출자를 받은 VC의 91.8%는 민간자금 매칭이 쉽지 않다고 토로했다. 업력별 투자에서 초기 기업 비중은 21.4%로 후기 기업은 42.8%로 절반에 불과해, 가장 혁신적이고 지원이 필요한 초기 기업에 정작 돈이 흘러가지 않고 있다. 모태펀드 등 정책자금 의존도는 절반에 육박하며, 코스닥 IPO에 편중된 회수 구조에서도 벗어나지 못해 투자-회수-재투자의 선순환이 단절된 상태다.
사모펀드와 벤처캐피털이 생산적 금융의 핵심 주체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정책 전환이 필요하다. 첫째, 사모펀드를 종투사 모험자본 의무 이행 실적에 포함시켜야 한다. 이를 위해 '모험자본 적격펀드' 체계를 도입하되, 투자 대상은 중소·벤처기업 및 첨단전략산업 기업으로 한정하고 보유 기간은 최소 3년 이상, 기업가치 제고 활동 이행을 조건으로 삼아 실질적인 생산적 금융의 역할을 담당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둘째, 벤처캐피털의 회수시장을 다변화해야 한다. 대한상공회의소 조사에서도 업계가 가장 시급한 과제로 '기술특례상장 요건 개선'과 '세컨더리 펀드 활성화'를 꼽았다. 투자금이 묶인 채 회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벤처캐피털 생태계 자체가 지속되기 어렵다. 비상장주식 평가 기준 표준화와 세제 명확화를 통한 세컨더리 펀드 활성화, 기업승계 M&A 펀드 신설, M&A 세제 혜택 확대가 병행돼야 한다.
셋째, BDC(기업성장집합투자기구) 활성화를 위한 세제 지원이 필요하다. 2026년 3월 시행된 BDC는 벤처캐피털이 운용할 수 있는 공모펀드로, 일반 국민도 혁신기업 투자에 참여할 수 있는 구조다. 정책자금 의존도를 낮추고 민간 자금 유입을 늘리기 위해서는 미국처럼 배당소득 분리과세 등 실질적 세제 혜택을 부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국민참여성장펀드 완판에서 보듯, 국민성장펀드와 생산적 금융에 대한 국민의 기대와 호응은 이미 충분히 확인됐다. 혁신기업이 성장해 투자자에게 높은 수익을 돌려주고, 그 수익이 다시 혁신기업에 투자되는 선순환 — 이것이 생산적 금융이 궁극적으로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다. 주목할 것은 이 선순환이 구조적으로 작동하는 거의 유일한 국가가 미국이며, 미국에서 사모펀드와 벤처캐피털이 가장 활성화돼 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점이다. 생산적 금융이 성공하려면 사모펀드와 벤처캐피털의 발전이 필수적이다. 지금이 바로 그 전환점이다.
필자 주요 이력
△연세대학교 경영대학 교수 △금융발전심의회 위원장 △전 자본시장연구원 원장 △ 전 기업지배구조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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