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도 원화는 금융위기 수준의 약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이다. 수출이 늘고 경상수지 흑자가 확대되며 기업 이익이 급증하면 통화는 강세를 보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일본이 그랬고 독일이 그랬으며 과거 한국도 그랬다.
그런데 지금 한국은 정반대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AI 반도체 수출은 사상 최대인데 원화는 달러당 1500원 안팎에서 움직이고 있다. 경제는 호황인데 환율은 위기 국면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을 영국의 경제 전문지 파이낸셜타임스가 주목했다. FT는 최근 장문의 분석 기사에서 한국 원화 약세를 "근본적인 수수께끼(Fundamental Puzzle)"라고 규정했다. 미국외교협회(CFR)의 브래드 세처 선임연구원 역시 "반도체 수요 급증의 최대 수혜국 가운데 하나가 여전히 위기 수준의 환율에서 거래되고 있다는 것은 설명하기 어려운 현상"이라고 평가했다.
FT는 이에 대해 두 가지 핵심 원인을 제시한다.
첫 번째는 글로벌 자금의 리밸런싱 현상이다. 한국 증시는 지난해 가을 이후 폭발적인 상승세를 보였다. AI 반도체 슈퍼사이클에 대한 기대감 속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중심으로 시장 전체가 급등했다. 문제는 너무 빨리 올랐다는 데 있다. 글로벌 펀드들은 특정 국가나 특정 종목 비중이 지나치게 커지는 것을 경계한다. MSCI와 같은 글로벌 지수 편입 비중을 넘어서는 경우 위험 관리 차원에서 일부를 매도해야 한다.
FT에 따르면 외국인 투자자들은 올해 들어 한국 주식을 순매도 기준 사상 최대인 790억 달러 규모로 팔아치웠다. 한국 경제가 나빠서가 아니다. 오히려 너무 좋아졌기 때문이다. 코스피가 급등하면서 글로벌 자산 배분 기준을 초과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포트폴리오 조정 매물이 쏟아진 것이다.
주식을 판 외국인들은 원화를 달러로 바꿔 본국으로 송금한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원화 약세 압력으로 이어진다. 한국 경제가 좋아질수록 오히려 단기적으로 원화가 약해지는 역설적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두 번째 원인은 FT가 더욱 중요하게 본 부분이다.바로 이른바 'DRam 달러' 현상이다.
브래드 세처 연구원은 한국의 상황을 중동 산유국들의 페트로달러에 비유했다. 과거 산유국들은 석유를 수출해 막대한 달러를 벌어들였지만 그 돈을 자국으로 가져오기보다 미국 금융시장에 재투자했다. 그 결과 달러가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면서 국제 금융시장에서 독특한 순환 구조가 만들어졌다.
세처는 지금 한국에서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본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AI 반도체 판매를 통해 막대한 달러를 벌어들이고 있다. 그러나 과거와 달리 이 달러를 모두 국내로 들여오지 않는다. 미국 데이터센터 투자, 해외 연구개발, 글로벌 인수합병, 해외 생산기지 확장 등에 사용하기 위해 상당 부분을 외화로 보유하고 있다.
예전에는 수출기업이 달러를 벌면 이를 원화로 환전해 국내에 들여왔다. 그 과정에서 원화 수요가 늘고 환율은 하락했다. 그러나 오늘날 글로벌 기업들은 다르다. 해외에서 벌어들인 달러를 해외에서 그대로 사용한다. 따라서 경상수지 흑자가 발생해도 원화 강세로 연결되지 않는다.
이것이 FT가 말한 DRam 달러 현상이다.
AI 반도체 수출이 늘어날수록 오히려 해외에 머무는 달러도 늘어난다. 한국 경제는 흑자를 기록하지만 원화는 강세를 보이지 못한다. 과거 경제학 교과서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새로운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여기에 중동 전쟁도 영향을 주고 있다. 이란 전쟁으로 국제 유가가 상승하면 한국은 에너지 수입 부담이 커진다. 또한 원화는 엔화와 높은 상관관계를 갖고 있는데 최근 일본 엔화 역시 약세 흐름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외부 요인들이 원화 약세 압력을 더욱 키우고 있다.
그러나 FT가 지적한 것처럼 현재 원화 약세는 경제 펀더멘털과 상당한 괴리를 보이고 있다. 경상수지는 사상 최대 수준이고, 반도체 기업들은 역사상 가장 많은 돈을 벌고 있으며, 한국 경제의 성장 전망도 오히려 상향 조정되고 있다. 그럼에도 원화가 금융위기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결국 시장이 언젠가 조정될 수 있는 불균형을 안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원화의 반격은 언제 시작될 것인가. 향후 전망에 대해서는 오히려 원화 강세 가능성을 예상하는 전문가들이 적지 않다.
FT가 소개한 투자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는 지금의 환율 수준이 장기적으로 지속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경제 펀더멘털이 지나치게 강하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은 AI 반도체 슈퍼사이클의 최대 수혜국이다. 생성형 AI와 데이터센터 투자 확대가 계속되는 한 HBM과 메모리 반도체 수요는 구조적으로 증가할 가능성이 높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수익 역시 당분간 높은 수준을 유지할 것으로 전망된다.
더 중요한 것은 환율 기대심리다. 기업들은 원화가 계속 약세일 것으로 판단하면 달러를 계속 보유하려고 한다. 그러나 어느 시점에서 원화 강세 전환 신호가 나타나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해외에 보관하던 달러를 국내로 송환하려는 움직임이 한꺼번에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FT가 주목한 것도 바로 이 부분이다.원화 강세 전환이 시작되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비롯한 대기업들의 달러 송환이 급증할 수 있고, 이것이 다시 원화 강세를 부추기는 자기강화 현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일종의 역(逆) 도미노 현상이다. 지금은 원화 약세가 달러 보유를 유도하고 있지만, 방향이 바뀌는 순간 달러 매도와 원화 매수가 동시에 쏟아질 수 있다.
대만 달러 역시 비슷한 상황이다. AI 반도체 수출국인 한국과 대만은 현재 경제 펀더멘털 대비 통화 가치가 과도하게 저평가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따라서 향후 몇 년 안에 원화와 대만 달러가 동시에 강세 국면에 진입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제는 환율 구조를 바꿔야 한다. 금융당국 역시 이러한 현상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한국은행은 최근 원화가 경제 펀더멘털에 비해 과도하게 약세라고 평가하며 필요할 경우 단호한 대응에 나설 수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단기적인 시장 개입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보다 중요한 것은 구조적 대응이다.
첫째, 해외에서 벌어들인 수익이 국내 투자와 고용으로 연결될 수 있도록 제도를 정비해야 한다.
둘째, 글로벌 투자자들이 한국 시장을 보다 장기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자본시장 선진화를 지속해야 한다.
셋째, 원화 국제화와 외환시장 개방을 더욱 확대해 원화의 위상을 높여야 한다.
넷째, AI 반도체 수출 호황이 국민경제 전체로 확산될 수 있도록 데이터센터, 전력망, AI 인프라 투자와 연결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결국 지금의 원화 약세는 위기의 신호라기보다 대한민국 경제가 새로운 단계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과도기적 현상일 수 있다. 과거 한국은 수출을 통해 달러를 벌어오는 나라였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은 세계 AI 산업의 핵심 공급망으로서 달러를 글로벌 자산으로 운용하는 나라가 되고 있다.
FT가 말한 DRam 달러 현상은 어쩌면 한국 경제가 선진국형 구조로 이동하고 있다는 또 하나의 징후일지 모른다. 중요한 것은 이 거대한 AI 반도체 호황을 단순한 수출 실적으로 끝내지 않고 국가 경쟁력과 국민소득 향상으로 연결하는 것이다. 그것이 원화 강세보다 더 중요한 대한민국의 미래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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