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2일, 이북5도청 2층에 자리한 평안남도 지사실의 문을 열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책상 위에 빈틈없이 쌓인 자료와 행정 서류들이었다. 그 옆으로는 색색의 펜으로 날짜별 일정을 빼곡하게 채워둔 수기 업무 일지가 펼쳐져 있었다. 최근 "하는 일 없이 세금만 쓴다"는 세간의 비판이 일자, 정 지사가 아침 일찍 출근해 그동안의 행정 기록들을 직접 꺼내둔 것이다.
수북한 기록들을 곁에 둔 채, 응접실 유리 탁자 너머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희끗한 백발에 정갈한 육군 벨트와 보청기를 낀 채 장군 출신다운 꼿꼿함을 유지하는 정경조 평안남도지사(74), 그리고 수십 년간 대중과 호흡하며 살아온 문화예술인 출신의 명계남 황해도지사(74)였다. 1952년생 동갑내기로 전혀 다른 삶의 궤적을 그려왔던 두 사람은 현재 880만 이북 도민 사회를 이끈다는 같은 무게를 짊어지고 있다. 침묵을 지키던 이들이 이북5도청 사상 처음으로 언론 앞에 나서게 된 이유는 단 하나, 자신들을 향한 오해를 넘어 잊혀가는 실향민의 역사를 지켜내기 위해서다.
두 사람은 평안남도와 황해도를 상징적으로 묶어 '서도(西道)'라 부르며 협력하고 있다. 이들은 단순한 정무직 공무원을 넘어 실향민의 궤적을 발굴하고 보존하는 '역사의 기록자' 역할을 다하고 있었다. 정 지사는 부족한 예산 속에서도 직접 도서관을 뒤져 매뉴얼을 만들며 76년 만에 처음으로 평안남도 16개 시군의 역사 조사연구서를 발간했다. 명 지사 역시 뜻을 함께하며 황해도 실향민 자료를 전산으로 기록하는 디지털화 작업에 착수했다.
세간의 비판은 각자의 분야에서 치열하게 살아오다 노년에 이르러 실향민 사회에 마지막 헌신을 다하려는 두 지사에게 가장 뼈아픈 지점이다. 정 지사는 이북5도위원회가 단순한 사업 부서가 아니라 전 국민의 17%에 달하는 880만 실향민과 북한 이탈 주민을 관리하고 연결하는 '행정 기관'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법무부나 행정안전부가 거대한 예산을 조직 유지와 인건비에 쓰듯 위원회 역시 이북 도민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필수 행정 비용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일각에서 제기되는 '명예직 전환' 요구에는 선을 그었다. 정경조 지사는 단순 자문 역할에 그치는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등 여타 명예직과는 달리 "도지사는 정부 부처를 상대로 도민의 권익을 대변하고 무형유산을 발굴해야 하는 실질적인 행정가 자리"라며 "만약 도지사가 명예직으로 격하되면 부처 협상력을 잃고 실향민이 행정 사각지대로 내몰릴 수 있다"고 우려했다.
최근 일각에서 '보은성 인사'가 아니냐는 의심을 받기도 했던 명계남 지사는 "올해 이북5도가 언론의 관심을 받은 것이 나 때문이라는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는다"고 담담 말했다 . 그러면서도 "과거 '노사모'라는 11만 거대 조직을 이끌어 봤고 문화 정책도 다뤄본만큼, 내 자리에서 묵묵히 실력을 증명할 테니 부디 지켜봐 달라"고 책임감을 내비쳤다.
두 지사는 이북도민의 역사적 가치를 대중에게 알리기 위한 새로운 시도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미래 세대와 소통하기 위해 유튜브 대담을 기획하고, 한국전쟁 당시 대동강 철교를 건너던 피난민의 비극적 애환을 평화 메시지로 승화한 음악극 '대동강의 눈물' 공연도 추진하고 있다.
이들이 방대한 자료를 발굴하고 기록하는 데 매달리는 이유는 단 하나다. 1세대 실향민들의 기억이 소실되는 것은 곧 대한민국 근대사의 소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들은 과거 보존을 넘어 미래를 향한 적극적인 실천도 다짐했다. 정 지사는 "도내 시장·군수들을 모아 통합 봉사단을 꾸려 국가 재난 시 돕고 소외된 이웃에게 연탄 배달도 하고 싶다"며 이북도민 사회가 국가에 능동적으로 기여하는 조직으로 거듭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명 지사는 실향민들의 주요 피난 경로였던 인천시 강화군 교동도에 '실향민 역사 박물관'을 건립하는 것을 임기 내 추진해야 할 핵심 숙원 사업으로 꼽았다. 그는 "당장 예산 확보가 어렵다면 도민들이 펀딩을 해서라도 기본 설계부터 힘을 모아보려 한다"며 강한 의지를 내비쳤다.
정 지사는 "완성된 통일은 단순히 도로를 놓고 아파트를 짓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억척스럽게 보존해 둔 이북의 문화가 훗날 그곳에서 다시 창달될 때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이라며 "치열하게 남기는 이 기록들이 다가올 평화와 통일의 시대를 여는 씨앗이 되길 바란다"고 힘주어 말했다.
세간의 눈초리 속에서도 도지사라는 자리를 단순한 감투가 아닌 무거운 사명감으로 증명해 내려는 두 사람. 880만 실향민을 껴안고 묵묵히 나아가는 이들의 치열한 여정은 탁자 위에 빈틈없이 쌓인 자료와 행정 서류들처럼 흔들림 없는 실체로 빛나고 있었다.
이북5도위원회의 조직 운영 현황과 역할 재정립의 필요성을 짚어보는 심층 기획 보도는 '[아주 탐사기획] 출근 늦고 업추비는 자택 인근…이북5도위 존폐론 재점화'를 통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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