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전쟁과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발이 묶였던 우리 선박이 처음으로 홍해를 빠져나왔다. 사우디아라비아 얀부항에서 원유를 실은 한국 선박이 고위험 수역인 홍해를 무사히 통과해 국내 수송에 나선 것이다. 정부가 24시간 실시간 모니터링 체계를 가동하며 항로 안전을 지원한 결과다. 호르무즈 봉쇄 이후 우회로를 통해 원유를 들여온 첫 사례라는 점에서 의미는 작지 않다.
그러나 이 장면을 ‘돌파구’로 읽기에는 상황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홍해는 이미 안전한 항로가 아니다. 2023년 10월 이스라엘-하마스 충돌 이후 후티 반군의 공격으로 선박 피격이 최소 79건 발생했다. 원유를 실은 선박이 무사히 빠져나왔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항로 자체가 여전히 군사적 위험에 노출돼 있다는 점이다. 이란 군 최고 작전사령부인 하템 알안비야 중앙사령부는 미국의 호르무즈 봉쇄가 지속될 경우 페르시아만과 오만해, 나아가 홍해까지 모든 수출입을 차단하겠다고 경고하고 있다.
결국 호르무즈를 피하자니 홍해가 불안하고, 홍해마저 안전하지 않다면 사실상 선택 가능한 해상 경로 자체가 줄어드는 셈이다. 이번 항해 성공은 성과이면서 동시에 경고다. 지금의 에너지 수송 체계가 얼마나 좁은 공간 위에 서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기 때문이다.
한국은 원유를 들여와 소비하는 나라에 그치지 않는다. 이를 정제해 다시 수출하는 구조를 갖고 있다. 석유화학과 정유 제품은 지난해 각각 수출 3위와 4위 품목으로, 두 산업이 벌어들인 수출액만 885억 달러에 달한다. 이는 자동차 수출(765억 달러)을 넘어서는 규모로, 전체 수출의 약 14%를 차지한다.
SK에너지, GS칼텍스, S-OIL, HD현대오일뱅크 등 4대 정유사는 지난해 항공유 8600만 배럴을 수출해 전 세계 공급의 약 4%를 담당했다. 단일 국가 기준으로는 최대 규모다. 한국 경제에서 에너지는 단순한 비용이 아니라, 수출과 성장의 기반 산업이다. 세계 최대 산유국인 미국조차 정제유에서는 한국에 의존하고 있다. 한국산 항공유는 미국 전체 수입의 71%를 차지하며, 워싱턴주와 캘리포니아 등 서부 지역에서는 의존도가 80%를 넘는다.
이처럼 한국은 글로벌 에너지 공급망에서 ‘중간 허브’ 역할을 수행해왔다. 중동에서 원유를 들여와 이를 고부가 제품으로 가공해 다시 세계로 내보내는 구조다. 문제는 이 시스템이 특정 지역, 특정 항로에 과도하게 의존하고 있다는 데 있다.
미국은 해협의 리스크를 거론하며 한국에게 자국산 원유 수입 확대를 요구하고 있다. 현재 미국산 원유 비중이 현재 16%에서 60%로 확대될 것으로도 일부는 보고 있다. 하지만 이 또한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미국은 셰일 혁명 이후 경질유 생산이 중심인데, 한국 정유 시스템은 사우디 등 중동산 중질유를 기반으로 최적화돼 있다. 원유의 성격이 바뀌면 정제 효율과 수익 구조, 생산 제품이 모두 달라진다.
단순한 수입선 변경이 아니라 산업 구조 전반을 건드리는 문제다.
그동안 한국은 ‘가장 싼 길’을 찾아왔다. 운임이 낮고, 공급이 안정적이며, 정제 효율이 높은 경로를 선택하는 것이 합리적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전제가 흔들리고 있다. 해협은 봉쇄될 수 있고, 항로는 공격받을 수 있으며, 물류는 군사적 통제 아래 놓일 수 있다.
실제 변화는 이미 비용으로 나타나고 있다. 호르무즈 통항량은 전쟁 이전보다 급감했고, 선박 보험료와 우회 운송 비용은 빠르게 상승하고 있다. 이 비용은 정유사와 석유화학 기업의 마진을 압박하고, 결국 국내 유가와 물가로 전가된다. 지금까지 기업들이 계산해온 물류 비용에 ‘지정학적 프리미엄’이 본격적으로 붙기 시작한 것이다.
이번 홍해 항해 성공은 분명 의미 있는 성과다. 그러나 그것이 보여주는 메시지는 낙관이 아니라 경고에 가깝다. 이제는 어느 항로도 완전히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 그리고 기존의 효율 중심 전략으로는 이러한 리스크를 감당하기 어렵다는 현실이다.
이제 기준을 바꿔야 한다. 가장 싼 경로가 아니라, 가장 안전한 경로를 중심으로 에너지 전략을 다시 설계해야 한다. 공급선 다변화와 항로 분산, 대체 정제 거점 확보는 더 이상 선택이 아니라 필수에 가까워지고 있다.
에너지 비용의 개념도 달라지고 있다. 앞으로의 비용에는 단순한 원가와 운임을 넘어, 지정학적 위험과 공급 안정성이 함께 반영될 수밖에 없다. 더 비싸더라도 더 안전한 선택이 오히려 더 합리적인 시대가 오고 있는 것이다.
홍해를 건넌 한 척의 선박은 위기를 넘긴 사례일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지금의 에너지 시스템이 얼마나 좁은 통로 위에 서 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한국 경제는 지금, 효율의 시대에서 안전의 시대로 넘어가는 문턱에 서 있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르포] 중력 6배에 짓눌려 기절 직전…전투기 조종사 비행환경 적응훈련(영상)](https://image.ajunews.com/content/image/2024/02/29/20240229181518601151_258_161.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