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정부와 한국거래소가 강조하는 두 숫자가 있다. '코스피 6000 시대', 그리고 '세계 9위 자본시장'이다. 일주일 전에도 한국거래소는 증권시장 개장 70주년 기념식에서 "인공지능(AI)을 활용해 시장 감시체계를 고도화하고 세계 최고의 자본시장으로 나아가겠다"고 공언했다.
그런데 화려한 수사 뒤에 가려진 전산망의 민낯을 마주하는 건 매번 투자자의 몫이다. 지난 9일이 그랬다. 이날 코스피가 폭락하며 서킷브레이커(CB)가 발동된 지 2시간 뒤 'KODEX WTI원유선물(H)' 시장의 호가창이 멈춰 섰다. 거래소 설명에 따르면 시가 단일가 매매 과정에서 상한가 배분을 기다리던 특정 호가가 문제였다.
개장 직전 시가 형성 단계에서 들어온 상한가 배분 호가가 CB 발동 이후의 단일가 매매 로직과 뒤엉키며 '수량 불일치'를 일으켰다. 장 초반 상한가 배분을 기다리던 특정 호가가 정정됐음에도 불구하고 시스템 로직이 이를 배분 대상에서 제때 걸러내지 못한 것이다. 수량 불일치는 결국 오후 12시 32분, 체결 엔진의 비정상적인 중단으로 이어졌다. 비상 상황을 수습해야 할 안전장치가 도리어 아침부터 쌓인 데이터 찌꺼기를 소화하지 못한 채 전산 장애의 뇌관이 된 셈이다. 거래는 2시간 20여분 뒤에야 정상화됐다.
거래소 측은 '극히 예외적인 케이스'라고 설명했다. 특정 주문자의 정정 주문과 CB라는 특수한 상황이 겹친 천재지변성 사건이었다는 항변이다. 런던 증권거래소(LSE)와 뉴욕 증권거래소(NYSE)도 멈춘 전례가 있다고도 했다. 실제로 LSE는 2024년 7월 마이크로소프트 시스템 장애 여파로 20분간 지수 산정이 지연된 바 있고 NYSE 역시 지난 2023년 1월 전산 오류로 시초가 형성에 실패한 사례가 있다.
그러나 거래소가 간과한 사실이 있다. 런던과 뉴욕 등 선진시장의 사고가 우리 시장의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는 점이다. 자본시장은 이미 여러 차례 경고음을 냈다. 불과 1년 전인 2025년 3월, 동양철관의 체결 오류로 코스피 전 종목 거래가 7분간 중단되는 사상 초유의 사태를 겪었다. 당시에도 거래소는 '재발 방지 대책 마련과 시스템 안정화'를 약속했다.
하지만 1년 만에 판박이처럼 사고가 난 것이다. 유형은 제각각이지만 본질은 같다. 시스템이 수용할 수 있는 '예외'의 범위가 지극히 좁고 운영의 유연성은 야심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투자자 입장에서는 매번 구멍이 뚫리는 일이 반복되는 게 곤혹스럽다. 지난해의 균열을 메우면 올해는 또 다른 곳이 터진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사람이 하는 일이라 100% 완벽할 순 없다"고 토로하지만 코리아 프리미엄을 외치며 70주년 축배를 들었던 시장 운영자치고는 책임감이 가볍다.
지금 우리 시장은 외형 확장에 사활을 걸고 있다. 거래 시간 연장과 결제 주기 단축을 논하며 글로벌 투자자를 유치하겠다고 공언한다. 하지만 정작 안방의 '집토끼'는 데이터 한 줄을 처리 못해 병목 현상을 겪는다. 세계 최고의 자본시장이라는 명분에 매몰돼 시장의 본질인 '안정적 체결'이라는 기본값을 상실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어제의 소동 역시 머지않아 잊힐 것이다. 거래소는 기술적 한계를 강변하는 해명을 내놓을 것이고 사고 원인은 '특이 사례'로 박제될 터다. 사실관계 파악을 위한 근본적인 성찰이나 인프라에 대한 과감한 투자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다음번 '데이터 불일치'는 더 큰 시장의 실망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보이는 숫자를 믿기 위해 당장의 부실을 감내해야 하는 시대가 계속되지 않길 바랄 뿐이다. 지금 거래소가 할 일은 70주년의 영광이란 숫자를 강조할 게 아니라 폭락장 속에서 투자자들의 우려를 최소화할 단단한 지반을 구축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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