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째 출국 금지 묶인 '선박왕'···法 무죄 판결에도 4000억 과세 분쟁 '현재 진행형

  • 시도그룹 권혁 회장, 거주자 판정 두고 국세청과 장기 법적 다툼···국내 조선업에 13조 기여 행적도

권혁 시도그룹 회장 그래픽ChatGPT
권혁 시도그룹 회장 [그래픽=ChatGPT]

세계 해운업계에서 한때 '한국판 오나시스'로 불리던 시도그룹 권혁(75) 회장이 2010년 12월 시작된 출국 금지 조치 아래 15년째 국내에 묶여 있다. 검찰 수사와 재판, 국세청 과세 처분을 둘러싼 법적 다툼이 장기화하면서 해외 사업장을 직접 방문하지 못하는 상태가 이어지고 있다. 법원은 2심에서 핵심 혐의인 법인세 포탈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고, 대법원이 이를 확정했다. 그러나 '국내 거주자' 판정에 근거한 국세청의 과세 처분은 그대로 유지돼 권 회장은 현재 개인 체납 명단 최상위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권 회장이 수십 년에 걸쳐 한국 조선업과 해운업에 기여한 행적과, 국제 해운 관행에 대한 국내 조세 행정의 해석이 충돌한 이 사건은 단순한 개인 탈세 문제를 넘어 글로벌 사업자에 대한 거주자 판정 기준의 타당성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 빈손으로 일본 건너가 250척 선단 일군 '맨주먹 신화'

권혁 회장의 해운업 입문은 199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현대자동차에서 13년을 근무하다 사표를 낸 권 회장은 당장의 사업 자금도 없이 일본으로 향했다. 아내가 분식집과 빵집을 운영하며 10년에 걸쳐 모은 돈으로 가족 생계를 꾸리는 형편이었다. 1993년 그는 일본 종합상사 마루베니의 사무실 한쪽 책상 하나를 빌려 시도그룹의 전신을 세웠다. 자본도, 인맥도 변변치 않은 상황에서 일본인들이 장악하고 있던 자동차 전용선 시장에 진입한 것은 그 자신의 표현대로 "바늘 하나로 거대한 벽을 뚫는" 일이었다.

이후 권 회장은 홍콩을 거점으로 선박 금융 기반을 구축하며 선대를 빠르게 늘려 나갔다.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과 장기 운송 계약을 체결해 안정적인 수익 기반을 다졌고, 2008년 리먼 브라더스 사태 이전에는 250척 규모의 선단을 운용하는 데 이르렀다. 권 회장은 이 과정에서 선박 관리, 운항 법인을 각각 분리하는 방식을 택했는데, 이것이 훗날 과세 당국과의 분쟁에서 핵심 쟁점이 됐다.

◆ 한국 조선소에 30년간 13조원 발주···부산에 선박관리 회사도

권 회장의 사업이 해외를 무대로 했음에도 한국 경제와의 연결 고리는 두드러진다. 권 회장은 2004년경부터 신규 선박 건조를 한국 조선소에 집중 발주했다. 시도그룹이 HD현대 그룹 등 국내 조선소에 발주한 신조 선박은 121척, 발주액은 약 71억5000만 달러(약 9조원 이상)에 달한다. 신조 발주 외에 부산 선박관리 법인 운영, 선박 보험, 한국선급(KR) 선박 등록 등을 합산하면 약 96억4000만달러, 한화로 13조원에 가까운 자금이 국내로 유입된 것으로 집계된다.

1995년 부산에 선박관리 회사 시도상선을 설립한 것도 눈에 띈다. 당시 일본인 직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싱가포르나 일본 대신 부산을 선택했다. 이를 통해 선박 기자재, 보험, 수리 관련 업무를 국내 업체에 발주했다. 2008년 금융위기 당시에는 일본 발주 선박 37척의 계약금을 포기하고 취소한 반면, 한국 조선소 발주분 30척(약 1조6000억원 규모)은 손실을 감수하고 전량 인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한국선급(KR)이 일본 시장 진출에 어려움을 겪을 당시, 일본 조선소와 금융권의 압력에도 자신의 선박 감리를 한국선급에 맡겨 일본 시장 개척을 지원했다.

◆ 2011년 국세청 고발···쟁점은 '탈세 여부'가 아닌 '거주자 판정'

2011년 4월 국세청은 권 회장을 역외 탈세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국세청이 산정한 추징금은 4101억원으로, 당시 개인에게 부과된 사상 최대 규모였다. 국세청의 핵심 논리는 권 회장이 조세 회피처에 '실질 없는 유령 법인'을 다수 설립해 소득을 은닉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권 회장 측은 이러한 해석이 국제 해운업의 관행을 간과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선박 한 척당 하나의 특수목적법인(SPC)을 설립하는 방식은 사고 발생 시 위험을 분산하고 선박 금융을 조달하기 위해 국제 해운업계에서 보편적으로 쓰이는 방식이다. 권 회장은 "국제적으로 선박 금융을 제공하는 은행들은 조세회피국에 회사를 설립하지 않으면 대출을 해주지 않는다"고 밝혔다. 당시 국내 금융기관들이 선박 구입 자금 융자에 소극적이었던 점도, 홍콩을 거점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던 배경으로 제시됐다.

국세청이 권 회장을 '국내 거주자'로 판단한 근거는 주민등록 보유, 가족의 국내 체류, 병원 및 신용카드 이용 기록 등이었다. 이에 대해 권 회장은 "한국 국적을 포기하지 않는 한 주민등록 말소는 불가능하다"며 "탈세 의도가 있었다면 이런 기록을 남기지 않았을 것"이라고 항변했다. 권 회장은 1993년부터 일본을 주 활동 무대로 삼아온 기간에 대해서는 국세청이 '비거주자'로 인정해 과세하지 않았으나, 2006년 이후 홍콩으로 거점을 옮기자 갑자기 '거주자'로 전환해 과세한 것은 전례와 모순된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일본 국세청에 납부한 세금 기록도 있다는 점도 언급됐다.

◆ 2심·대법원, 법인세 포탈 핵심 혐의 무죄 확정

2013년 2월 1심 재판부는 권 회장에게 징역 4년과 벌금 2340억원을 선고하고 법정구속했다. 그러나 항소심에서 상황은 달라졌다. 2심 재판부는 해외 법인을 통한 법인세 포탈이라는 핵심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단선회사 설립과 해외 거점 활용이 국제 해운업계의 일반적 관행에 해당하며, 이를 조세 회피를 위한 위장 행위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유죄가 인정된 것은 종합소득세 약 2억4000만원 포탈 혐의에 한정됐다. 형량은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으로 크게 줄었다. 대법원은 2016년 이 판결을 확정했다.

법원의 이 같은 판단은 주목할 만하다. 국세청이 '탈세의 도구'로 규정한 SPC 방식을 법원은 '해운업의 구조적 특성에서 비롯된 불가피한 선택'으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형사 재판에서의 무죄 확정은 과세 처분 자체의 타당성 문제와는 별개의 법적 영역이지만, 두 판단이 충돌한다는 점에서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 세금 내려면 회사 팔아야···출국 금지 속 원격 경영만

형사 재판은 마무리됐지만, 권 회장의 상황은 여전히 복잡하다. 국세청의 과세 처분은 유지됐고, 원금에 14년치 가산세가 더해져 체납액은 3938억원으로 불었다. 권 회장 측은 "개인 재산이 없어 회사를 매각해야만 세금을 납부할 수 있는데, 이 해운 불경기에 선박을 처분하는 것도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설명한다. 출국 금지로 인해 해외 자산의 현금화도 여의치 않은 상황이라는 것이다.

2026년 1월 현재, 권 회장은 홍콩에 있는 회사를 전화와 이메일 등 원격 수단으로 경영하고 있다. 128척의 선박을 운용하는 해운 기업의 총수가 15년째 현장을 직접 방문하지 못하는 상태다. 

◆ 장기 출국 제한, 해운 경쟁력에도 부담···신속한 행정·사법 판단 필요

이 사건은 한 기업인의 세금 문제를 넘어 여러 층위의 질문을 던진다. 우선 '글로벌 사업자에 대한 거주자 판정을 어떤 기준으로 할 것인가'의 문제다. 권 회장처럼 해외에서 수십 년간 사업을 영위하면서도 한국 국적을 유지하고 가족이 국내에 생활 기반을 둔 경우, 과세 기준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는 아직 명확한 답이 없는 영역이다. 국제적으로도 유사한 논쟁이 반복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외화를 국내로 유입시키는 해운 기업인에 대한 장기 출국 제한이 국가 경제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지도 따져볼 필요가 있다. 13조원에 달하는 거래가 한국 경제로 유입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권 회장의 해외 네트워크와 현장 영업력이 작용했다. 그 영업 기반이 15년간의 출국 제한으로 약화됐다면, 국가가 세금 장부에서 거두지 못하는 금액 못지않은 기회 손실이 발생했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권 회장은 13년 전 법원에 제출한 탄원서 마지막에 "저를 저의 일터인 바다로 돌려보내 주어서 조국의 조선업과 해운업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적었다. 그 호소는 지금까지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법적 다툼이 이미 대법원 확정 판결로 마무리된 사안에 대해 행정 당국의 후속 처리가 이 상태로 10년 넘게 지연되는 것이 적절한지, 사회적으로 점검이 필요한 시점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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