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솝 우화 ‘토끼와 거북이’에서 거북이는 끝까지 기어가 승리한다. 성실함의 상징, 인내의 승리다. 하지만 그 이야기가 21세기 정글에서도 그대로 통할까.
만약 그 거북이가 어느 날 “이제는 기어가지 않겠다. 등에 로켓을 달고 날아오르겠다”고 선언한다면, 숲속 동물들은 박수를 칠까, 아니면 고개를 갸웃할까.
창립 58주년을 맞은 일진그룹의 허진규 회장이 바로 그 선언을 했다.
지난 반세기 동안 일진은 전선과 부품을 만들며 우직한 거북이처럼 걸어왔다. 화려한 소비재, 반짝이는 유행, 언론의 스포트라이트와는 거리를 뒀다. 대신 공정 깊숙이 들어가 빠질 수 없는 자리를 차지했다. 숱한 토끼들이 속도를 자랑하다 쓰러질 때, 일진은 느렸지만 살아남았다.
그런데 이제 허 회장은 “상시적 위기”를 말하며 피지컬 AI, 로봇, 원전이라는 최첨단 로켓을 달겠다고 한다. 기어가던 거북이가 하늘을 보겠다는 선언이다.
여기서부터 이야기는 불편해진다.
시장에는 오래된 격언이 있다. “위험 없는 수익은 없고, 대가 없는 도약도 없다.”
거북이가 날기 위해서는 단순한 의지가 아니라, 혹독한 가격표를 받아들여야 한다. 허 회장이 주문한 “빠른 실행, 짧은 회수 기간, 측정 가능한 성과”는 바로 그 가격표다. 멋진 비전의 조건이 아니라, 현금 흐름과 생존을 동시에 요구하는 청구서다.
당연히 반문이 따라온다.
“수십 년이 걸리는 원전과 AI 기술을 개발하면서 어떻게 단기 성과를 내라는 말인가.”
논리적으로 보면 모순처럼 보인다. 그러나 시장은 논리 교과서가 아니다. 시장은 “미래를 약속하는 기업”보다 “오늘 팔 수 있는 것을 가진 기업”을 더 오래 살려둔다.
허 회장의 주문은 그래서 학자의 논문이 아니라, 장사꾼의 직감에 가깝다.
“먼 미래를 위해 투자하되, 오늘 시장에서 통하는 물건을 만들어라.”
‘수처작주(隨處作主)’라는 화두도 마찬가지다.
어디서든 주인이 되라는 말은 듣기 좋은 도덕 교과서의 문장이 아니다. 시장에서는 주인이 되지 않으면 두 가지 중 하나다. 누군가의 하청이 되거나, 경쟁에서 밀려난다.
지시를 기다리는 조직은 안정적일 수는 있어도, 위기 국면에서는 가장 먼저 굳어버린다. 허 회장이 요구하는 주인의식은 미덕이 아니라 생존 기술에 가깝다.
일진이 과거에 유행을 좇지 않았던 이유도 따지고 보면 고상해서가 아니다.
그때는 유행보다 틈새에 기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기회의 중심이 AI와 로봇, 반도체로 이동했다면, 거북이가 다시 방향을 틀어야 하는 건 미학의 문제가 아니라 본능의 문제다.
물론 위험은 크다. 가장 유행하는 바다는 가장 경쟁이 치열한 바다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될 수도 있고, 뱁새가 황새 따라가다 다리가 찢어질 수도 있다. 시장은 결과로만 판단한다. 과거의 공로, 오래 버텨온 역사, 성실함에 대한 훈장은 계산서에 적히지 않는다.
그래서 이번 ‘비상’ 선언은 낭만적이지 않다. 오히려 냉정하다.
58년 된 거북이는 자신이 더 이상 느린 안전지대에 머물 수 없다는 걸 안다. 날기 위해서는 깃털이 아니라, 돈·기술·사람·시간을 갈아 넣어야 한다는 것도 안다. 그 대가를 치를 준비가 돼 있느냐는 질문이 이제 남았다.
시장은 늘 이렇게 말해왔다. “살아남은 이유는 설명해주지 않는다. 탈락한 이유만 분명히 보여줄 뿐이다.”
구호만 외치는 기업에게 시장은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
거북이가 하늘을 날 수 있을지는 아직 모른다. 다만 로켓의 연료를 실제로 채우고 있는지, 시장은 아주 차갑게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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