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승연의 타임캡슐] 루터의 운인가 하나님의 섭리인가

·황승연
[황승연 경희대학교 사회학과 명예교수]
 
 
 마르틴 루터의 위대한 여정(6)
 
종교개혁 당시 교황은 레오 10세(Leo X, 재위 1513~1521)였다. 그는 유럽 최고의 금융 가문인 피렌체의 메디치(Medici) 가문 출신이었지만 파산 위기에 몰려 푸거(Fugger) 가문에 큰 빚을 졌다. 푸거는 독일 아우크스부르크 출신으로 직물과 향신료 무역으로 부를 축적하고 은광과 구리광 개발에 투자하여 구리 유통망을 장악한 후 금융업에 진출했다. 그는 유럽에서 가장 막강한 은행가이자 자본가로 성장하여 전성기 때의 메디치 가문보다 영향력이 크다는 평가를 받았다. 푸거 은행은 신성로마제국 황실을 비롯해 여러 왕국에 돈을 빌려주고 이자로 막대한 수익을 거두었으며 교황청과도 거래했다.
 
레오 10세는 교황 취임 후 전쟁, 성 베드로 대성당 건설, 예술 후원, 뇌물, 연회, 궁정 운영 등으로 파산 직전이었다. 그는 푸거 은행에서 돈을 빌리려 했고, 은행은 담보를 요구했다. 교황청은 이를 수락했는데, 담보는 면죄부 판매 수익이었다. 교황은 13세에 이미 추기경이 되었다. 1513년 교황 율리우스 2세(Julius II)가 죽자, 새로운 교황을 뽑는 콘클라베(Conclave)가 열렸는데, 이 과정에서 메디치 가문의 정치적 영향력과 돈이 활용되었다. 추기경들은 돈을 받고 성직 자리와 교황청 관직을 약속받았는데 이때 뿌려진 돈 역시 푸거 가문에서 빌린 것이었다.
 
독일에서 면죄부 판매로 종교개혁을 촉발한 알브레히트(Albrecht von Brandenburg 1490~1545) 대주교는 자리를 사기 위해 교황청에 줄 돈을 푸거 은행에서 빌렸고, 그 빚을 갚기 위해 대대적인 면죄부 판매에 나섰다. 판매 수익의 절반은 교황청으로 갔고 나머지는 푸거 은행 대출금 상환에 사용되었다. 푸거 가문은 교황과 황제, 주교 선출 과정까지 금융으로 개입하여 종교와 정치를 쥐고 흔들었다. 종교개혁의 원인이 된 면죄부 판매 논쟁 뒤에는 푸거 가문의 금융 네트워크가 있었다. 루터는 훗날 "성직은 하나님의 부르심이 아니라 돈으로 사고파는 물건이었으며, 교황청과 황제조차 그의 주머니에 의존했다"고 말했다.
 
교황과 은행
 
교황은 이탈리아와 유럽 전체에서 막강한 정치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고, 메디치 가문은 교황청의 공식 은행 역할을 했다. 로렌초 데 메디치(Lorenzo de Medici, 1449~1492)는 가문에서 왕이나 황제보다 더 막강한 권위를 가진 교황을 배출함으로써 가문을 '신의 선택을 받은 집안'으로 만들고자 했다. 또한 교황직을 차지하면 금융업에서 영향력을 회복하고 사업도 더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다고 믿었다. 치밀한 계획과 노력으로 메디치 가문은 레오 10세(Leo X, 1513~1521), 클레멘스 7세(Clemens VII, 1523~1534), 피우스 4세(Pius IV, 1559~1565), 레오 11세(Leo XI, 1605)까지 4명의 교황을 배출했다.
 
교황이 푸거 가문의 귀중한 고객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이자와 원금을 제때 갚았기 때문이다. 푸거 은행은 70년 전에 시작된 성 베드로 대성당 건설에 교황이 본격적으로 뛰어드는 것을 우려했다. 빚의 상환이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국 전역에 면죄부를 대량으로 판매한다는 획기적인 아이디어가 나오면서 걱정을 조금 덜었다. 알브레히트 대주교는 막데부르크 대주교뿐 아니라 마인츠 대주교도 겸임하게 되었는데, 교황청은 겸임 금지에 대한 막대한 특별 사면료를 요구했다. 푸거 은행은 대주교에게 사면료 전액을 대출해 주었다. 이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면죄부 판매 수익금을 나눠 가지게 되면, 모두에게 이로운 거래가 될 것이라 믿었다.
 
거래가 순조롭게 이루어져, 신자들은 구원을 받고, 알브레히트는 빚 걱정에서 벗어나며, 도미니코회 수도사들도 이익을 얻고, 교황은 재정 걱정을 덜며, 성 베드로 대성당도 계획대로 지어질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비텐베르크의 고집 세고 비협조적이며 비세속적인 촌뜨기 수도사 마르틴 루터의 방해로 교황과 대주교와 은행의 전략에 제동이 걸렸다. 그가 방해하지 않았다면 모든 것이 아름답게 진행되었을 것이다. 그가 방해했을 때도 교황청과 교회는 여전히 "그를 조만간 처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루터가 고립된 환경에서 혼자 행동했다면 그것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주변에는 함께하는 동료들이 있었다. 그들은 부패한 수도원의 성직자들이 만든 위조 문서들을 분석하고 가짜를 가려내는 방법들을 개발했다. 교회 문서와 책들을 비판적으로 읽으면서 면죄부 판매가 거대한 사기극임을 밝혀냈다. 루터가 면죄부 판매를 비판한 것은 단순한 신학적 문제를 넘어 교황청과 금융가의 부패구조에 대한 도전이었다. 시골 변방의 수도사 한 사람이 전 세계를 돈과 권력으로 지배하던 구조에 돌을 던져 금이 가게 만든 사건이었다. 이것이 일파만파 번져서 전 유럽이 변화와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졌다. 푸거 가문은 큰 타격을 받았다. 교황청뿐 아니라 제국의 전쟁과 외교를 돈으로 뒷받침했던 가문이었지만, 루터의 문제 제기 후 면죄부 판매 사업이 부실해지자 급격히 몰락했다.
 
로마의 약탈과 교황의 몰락
 
종교개혁과 교황청 관련 사건이 또 하나 있었다. 1527년 메디치 가문에서 배출한 또 다른 교황 클레멘스 7세 시절에 일어난 '로마의 약탈(Sacco di Roma)'이 그것으로, 교황청 역사상 가장 굴욕적인 사건이었다. 당시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이 이탈리아 반도 지배권을 두고 전쟁 중이었는데, 클레멘스 7세는 외교적 줄타기를 하며 프랑스 편에 섰다가 신성로마제국 황제 칼 5세와 갈등을 빚었다. 황제는 로마와 교황청을 압박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다. 그러나 용병들로 구성된 신성로마제국 군대는 용병료 미지급에 불만을 품고 통제 불능 상태가 되면서 로마를 침공해 도시를 함락시켰다.
 
용병들은 로마에서 1만 2천 명의 시민을 학살하고 수도원, 성당, 귀족 저택을 강탈하고 처참하게 파괴하였다. 수도사와 수녀들이 능욕당했고 바티칸과 성 베드로 대성당까지 약탈당했다. 교황은 목숨 걸고 싸워준 스위스 근위대 덕분에 체포당하지 않고 산탄젤로성으로 도망쳐 7개월이나 감금당한 채 지냈다. 용병들은 성 베드로 대성당을 마구간으로 사용하고 겨울에는 문짝을 뜯어내어 땔감으로 사용했다. 시내의 거리에는 시신이 방치되어 나뒹굴었고 전염병이 창궐했다. 제국군은 교황의 몸값으로 교황청 1년 수입을 훨씬 초과하는 금액을 요구했다. 돈이 없었던 교황은 교황청의 보석, 금괴, 교회 장식품들을 비롯한 수도원 자산과 교황령의 일부 도시들을 넘겨주면서 풀려났다. 교황청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이 사건으로 교황은 외교적 독립을 완전히 상실했다. 로마는 '거룩한 도시'가 아니라 유럽 군대의 전리품으로 전락했고 로마 시민 대부분이 피난을 떠났다. 르네상스의 중심지 로마가 유린당하면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황금시대는 종말을 맞았다.
 
교황청의 치욕으로 불리는 이 사건으로 교회 권위가 완전히 무너졌고, 유럽은 교황을 더 이상 절대 권위로 보지 않게 되었다. 루터는 이 사건을 "하나님께서 교황청의 교만을 심판하신 것"으로 해석했다. 이 사건으로 루터의 신학적 주장이 단순한 반항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루터가 경고해 온 교황청의 부패와 심판이 실제 사건으로 드러나면서 그는 ‘교황의 타락을 가장 먼저 경고한 선지자'라는 이미지로 위상이 높아졌다. 루터파 개혁자들의 입지가 강화되었고 비텐베르크는 개혁의 중심지로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이때부터 루터는 비텐베르크를 넘어 유럽 교회의 대안적 지도자로 떠올랐다. 이 사건은 가톨릭교회의 쇠퇴, 르네상스의 종말, 종교개혁의 가속화라는 역사적 전환점이 되었다.
 
루터의 운인가 하나님의 계획인가
 
루터는 운이 좋았다. 종교개혁 초기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것은 작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의 결정적인 도움 덕분이었고, 종교개혁의 이론적 저술에 집중할 때는 부인 카타리나의 내조가 큰 역할을 했다. 그의 비판으로 면죄부 판매가 부실해지면서 당시 세상을 지배하던 교황청, 황제, 은행 사이에 균열이 생겨 시골 변방의 수도사 루터를 제거할 때를 놓쳤다. 제국의 무식한 용병들이 통제되지 않아 로마와 교황청을 습격하고 약탈했으며, 교황이 담을 넘어 피신하는 사건이 일어나 교황의 체면이 땅바닥에 떨어졌을 때 루터는 유럽 전체에서 유명한 인물이 되어 있었다.
 
‘로마의 약탈’ 사건 후 교황이 수난에 빠졌을 때 마침 오스만제국의 슐레이만 1세가 제국을 확장하고자 발칸반도와 헝가리를 점령하며 신성로마제국의 동부 국경을 위협했다. 1529년 비엔나가 무슬림의 공격을 받자, 칼 5세는 종교적 갈등 해결에 집중할 수 없어서 루터파에 대한 강경 대응을 유보했다. 이 틈을 이용해 루터는 동료 멜란히톤 교수가 작성한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이라는 개신교의 신학적 입장을 제후들과 황제 앞에서 공식화하게 된다. 28개 조항의 이 신앙고백은 루터교 신학의 기초가 되었고 이 사건은 종교개혁의 분기점이 되었다. 이렇게 적절한 시기마다 적절하게 터져준 사건들은 루터의 종교개혁이 전 유럽에 확산될 수 있는 시간을 벌게 하였다.
 
이 모든 것을 어찌 루터의 운으로만 평가할 것인가.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 아니라고 어찌 말할 수 있겠는가.


황승연 필자 주요 이력

▷독일 자르브뤼켄대학교 사회학 박사 ▷전 경희대 ㈜데이콤 공동 정보사회연구소장 ▷전 한반도 정보화추진본부 지역정보화기획단장 ▷경희대 사회학과 명예교수 ▷굿소사이어티 조사연구소 대표 ▷상속세제 개혁포럼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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