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눈] 소프트파워와 잃어버린 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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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예스24 중고샵]

내 인생 첫 일본 만화책은 ‘오렌지보이’다. 1990년대 중반, 일본 만화책은 왜색 논란으로 인해 사실상 수입이 금지됐고, 만화방에는 원제와 상관없는 이름이 붙은 해적판들이 버젓이 자리했다. ‘오렌지보이’는 ‘꽃보다 남자’의 불법 유통판이었다. 당시 출판사 사람들 눈에는 재벌가 아들들로 이뤄진 F4가 ‘오렌지족’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어쨌든 친언니가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부모님 몰래 일본 순정만화를 빌려 보기 시작했고, 덕분에 나는 초등학생 때부터 일본 만화책에 빠졌다. 언니와 비밀을 공유한다는 묘한 일탈감(?)도 도파민을 자극했던 듯싶다.
 
언젠가부터 불법 유통판은 사라졌고, 순정만화에서 시작된 일본 만화 사랑은 고등학교까지 이어졌다. ‘20세기 소년’, ‘슬램덩크’, ‘배가본드’, ‘이누야샤’ 등 손이 닿는 대로 읽었다. 대학교에 입학하면서 관심은 다른 곳으로 이동했지만, 세상의 책은 문학과 비문학, 성경으로 이뤄진다고 생각하던 부모님 눈엔 내가 일본 만화책에 붙들려있던 그 10년이 아마도 ‘잃어버린 10년’이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누군가는 일본을 두고 ‘잃어버린 10년’, 혹은 ‘잃어버린 30년’이라고 말하지만, 일본 경제 상황이 이런들 또 저런들 내겐 일본은 ‘강국’의 이미지가 강하다. 콘텐츠 강국 말이다.
 
일본 소프트파워의 위력은 의외의 장소, 반정부 시위에서 드러난다. 인도네시아, 마다가스카르, 네팔, 페루, 파라과이, 프랑스 등 전 세계 반정부 시위 현장에는 원피스, 나루토, 진격의 거인 등 일본 캐릭터들이 모습을 드러내곤 한다. 홍콩 송환법 반대 시위(2019~2020) 때는 도라에몽, 이웃집 토토로, 귀멸의 칼날 등 일본 만화 및 애니메이션 캐릭터들이 저항의 상징인 노란 우산을 든 이미지들이 배포됐다. 일본 캐릭터가 시위에서도 팬덤을 형성하는 강력한 힘을 가진 셈이다. 실제 일본 정부는 2033년까지 콘텐츠 산업의 수출액이 약 20조엔(약 188조원)에 달할 것으로 본다. 이는 현재 일본 자동차 산업계 수출액의 약 2배에 달하는 규모다.
 
일본에 망가가 있다면, 우리나라엔 웹툰이 있다. 웹툰은 이제 막 세계 무대에 발을 내디뎠다. 그러나 불법 유통이 발목을 잡고 있다. 박수현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의원에 따르면, 2022년부터 2023년까지 2년간 웹툰 불법 이용으로 인한 추정 피해액은 무려 8400억원에 달한다. 이는 약 2조1890억원 규모로 추산되는 국내 웹툰 산업의 20%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의 ‘2024 웹툰산업 실태조사’에 따르면 불법 웹툰을 이용하는 이유 중 하나로 응답자들은 ‘웹툰은 유료 결제할 가치가 없다(12.2%)’고 답했다.
 
90년대 만화방의 해적판은 오늘날 불법 유통 웹툰의 형태로 바뀌어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래도 해적판은 돈 내고 빌려봤다. 누군가의 창작물에 ‘유료 결제할 가치가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윤주혜 기자
윤주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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