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악령을 때려잡는 K팝 아이돌. 다소 황당하게 들리지만, 최근 공개된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이 설정으로 글로벌 팬들의 호응을 얻고 있다. 낯설지 않다. 이제 K팝은 음악을 넘어 웹툰, 게임, 애니메이션으로까지 뻗어나간다. 한 명의 아이돌은 더 이상 무대 위 가수에 그치지 않는다. 서사와 세계관, 뮤직비디오와 드라마, 굿즈와 캐릭터로 확장된다. 팬덤은 이 이야기 속에 스스로를 끼워 넣으며 문화적 충성도를 만들어간다.
그리고 그 세계관 소비의 종착지는 예상보다 일상적인 곳에서 완성된다. 바로 식탁 위다. K팝 팬들은 공연장 밖 푸드트럭에서 떡볶이와 치킨을 사 먹고, SNS에선 불닭볶음면 챌린지가 유행처럼 번진다. 인기 아이돌의 화장품보다, 그가 먹는 컵라면 한 그릇이 더 빠르게 바이럴된다. 한류 콘텐츠의 마지막 접점은 결국 '먹는 경험'에 있다.
수출 실적은 이 흐름을 수치로 증명한다.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지난해 K-푸드+ 수출액은 130억3000만달러로, 전년보다 6.1% 늘며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라면, 과자, 음료, 소스류 등 14개 품목이 사상 최대 수출액을 찍었고, 수출국도 199개국에서 207개국으로 확대됐다.
기업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삼양은 불닭볶음면을, 농심은 신라면을 앞세워 글로벌 시장에서 '한국적 매운맛'의 상징성을 공고히 했다. CJ제일제당은 만두와 비비고 브랜드로 북미 시장을 공략했고, BBQ와 네네치킨 등 치킨 프랜차이즈는 동남아 현지에서 빠르게 매장을 확대하고 있다. K푸드는 이제 단순한 식품이 아니라, 세계관을 입은 문화 콘텐츠이자 굿즈처럼 소비되는 대상이 됐다.
하지만 이 열풍이 얼마나 오래갈지는 장담하기 어렵다. 스타 협업, 한정판 패키지에 기대는 마케팅은 단기적 화제성은 크지만 지속성을 담보하긴 어렵다. 팬덤 소비는 유행이 식는 순간 빠르게 자취를 감춘다. 결국 반복 구매로 이어지려면 콘텐츠 만큼이나 '품질과 신뢰'가 중요하다.
실제 시장에선 붉은 신호가 감지되고 있다. 식품 수출이 늘면서 동시에 부적합 사례도 증가했다. 식품안전정보원에 따르면 최근 3년간 미국, 중국, 대만, 유럽연합(EU), 호주 등 주요 수출국에서 한국산 식품의 부적합 사례는 1025건에 달했다. 표시 위반, 잔류농약, 미생물 문제 등이 주요 원인으로 꼽혔다. '한국산 식품'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면 브랜드 이미지 전체가 타격을 입을 수 있다. 호기심으로 시작된 소비가 일상적인 소비로 굳어지려면 결국 '믿고 먹을 수 있는가'가 관건이다.
중소기업에겐 이마저도 더 먼 이야기다. 대기업은 자체 물류망과 자본을 앞세워 시장을 넓히지만 중소 식품기업은 해외 인증, 마케팅, 유통채널 확보 등에서 여전히 어려움을 겪는다. 정부는 수출 바우처나 해외 전시회 참가 지원 같은 제도를 운영 중이지만 실질적인 수혜는 대기업 중심이라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 한류의 힘이 산업 전반을 끌어올리지 못한다면 지금의 성과는 일부 기업만의 잔치로 끝날 수 있다.
현지화 역시 숙제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나트륨을 줄이거나 채식·비건 트렌드에 맞춘 제품이 더 주목받고 있다. 캐나다 시장에서는 유제품 규제를 피하기 위해 식물성 아이스크림으로 돌파구를 찾은 사례도 있다. 단순히 한국에서 잘 팔리는 제품을 수출하는 방식만으로는 한계가 분명하다. 현지 소비자의 식문화와 건강 기준을 반영한 맞춤 전략이 필요하다.
문화와 산업의 접점에 선 K푸드는 지금 중요한 기로에 있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보여주듯 세계관은 무한히 확장될 수 있다. 그러나 음식은 다르다. 포장보다 중요한 건 결국 맛과 품질, 안전성이다. 한류 소비의 끝이 식탁 위라면, 그 식탁은 단발성 굿즈가 아니라, 오래 기억될 맛과 신뢰로 차려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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