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정 확대와 기준금리 인하로 시중 유동성이 사상 처음 4400조원을 넘어서면서 자산시장 버블 우려가 커지고 있다. 넘치는 돈이 부동산과 주식시장으로 쏠리며 경제 불균형이 확대될 경우 돈을 풀어도 더는 경제가 작동하지 않는 '유동성의 함정'에 빠질 수 있다는 경고가 나온다. 전문가들은 이대로 가면 자칫 일본처럼 '잃어버린 30년'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한다.
한국은행이 15일 발표한 ‘통화 및 유동성’ 통계에 따르면 8월 기준 광의 통화량(M2·평잔·원계열)은 전년 동월 대비 8.1% 증가한 4400조2000억원으로 집계됐다. 2022년 7월(8.3%) 이후 처음으로 증가율이 8%대로 올라섰다. 코로나19 당시 역대급 돈 풀기로 2021년 12월 M2 증가율은 13.2%까지 치솟았다가 금리 인상 국면에 들어선 뒤 2023년 8월에는 2.2%까지 급락했다.
그러나 최근 금리 인하 사이클 전환과 새 정부의 확장적 재정 기조가 맞물리며 유동성 확대 추세가 다시 가팔라지고 있다. 상품별로는 채권형 펀드를 중심으로 수익증권이 12조8000억원 늘었고, 정기예·적금은 예대율 관리 영향으로 전월 4000억원 증가에서 8조3000억원으로 급증했다. 수시입출식저축성예금도 14조3000억원으로 두 배 이상 확대됐다. 이는 소비쿠폰 지급 등 지방정부 재정집행 자금이 일시 예치된 영향으로 풀이된다.
통상 M2 증가율이 7%를 넘으면 시중 유동성이 부동산·주식 시장으로 흘러갈 가능성이 큰 신호로 해석된다. 한국개발연구원(KDI) 분석에 따르면 통화량이 1% 증가할 때 주택가격은 1년 후 약 0.9% 상승한다. 실제 코로나19 시기 M2와 서울 아파트 값은 시차를 두고 비슷한 흐름을 보였다. M2 연간 증가율은 △2019년 7.0% △2020년 9.3% △2021년 11.7%였고, 같은 기간 서울 아파트 매매가격 상승률은 △1.1% △3.0% △8.0%였다.
일본은 1985년 플라자합의 이후 엔고로 수출이 급감하자 금리를 사상 최저로 내렸고 이때 풀린 유동성이 거품을 키웠다. 풀린 자금이 부동산과 주식으로 쏠리면서 1989년 자산가격 증가액은 명목GDP 대비 2.2배에 달했다. 당시 '토지 불패' 신화가 확산됐고 GDP 대비 민간신용 비율은 1985년 162%에서 버블 붕괴 직전인 1990년 208%까지 급등했다. 부동산 기업의 부채비율은 1980년대 이후 1000%에서 1500% 수준으로 치솟았다.
현재 '강남 부동산 불패' 믿음이 팽배한 우리나라 경제 구조가 그때와 비슷하다는 지적이다. M2 규모(4400조원)는 GDP 대비 1.7배에 달하고, GDP 대비 민간신용 비율은 200.7%로 200%를 넘어섰다. 기업대출 중 건설·부동산업 비중은 28.8%로 10년 전(20.5%)보다 크게 상승했다. 반면 한은이 전망한 올해 GDP 성장률은 0.9%에 그칠 전망이다.
가뜩이나 인구 감소로 인한 총수요 위축과 구조적 저성장이 예견되는 상황인데 돈이 자산시장에만 몰려 거품을 키운다면 일본식 장기 침체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김남주 한은 조사국 구조분석팀 팀장은 "우리 경제가 여러 분야에서 일본의 전철을 밟고 있다"며 "정밀한 거시건전성 규제 운용과 통화정책 공조 강화, 가계부채 관리 기조 유지, 과감한 구조조정을 통해 부채 비율을 엄격히 관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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