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완의 월드비전] 미국은 더 이상 '영원한 제국'이 아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사진EPA·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사진=EPA·연합뉴스]




반이민 정책은 자기파괴적 선택

올해 초 4년 만에 백악관에 복귀한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연설에서 미국을 “그 어느 때보다 더 위대하고, 더 강하고, 훨씬 더 특별한 나라”로 만들겠다고 밝혔다. 그는 “지금 이 순간부터 미국의 쇠퇴(America’s decline)는 끝났고, 미국의 황금기(The golden age of America)가 시작된다”고 호언했다. 선거 승리 수개월 전 펜실베이니아 야외 유세장에서 총기에 피습됐다가 극적으로 살아남은 일을 언급하며 “저는 하나님께서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라고 살려주셨다고 믿습니다”라고 말했다. 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는 그에게 단순한 정치적 구호가 아니라 신이 내린 명령에 가까운 소명임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그의 핵심 지지층인 공화당 내 강경파와 MAGA 세력의 최우선 과제는 반이민 정책으로 보인다. 그는 취임 당일 이민 문제 해결을 명목으로 멕시코 남부 국경 지역에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장벽 건설을 재개했다. 또 “미국인을 침략으로부터 보호”한다며 다수의 행정명령에 서명하고, 군 병력 투입과 함께 미등록 이민자 추방 절차에 착수했다. 미등록 이민자 추방과 군 병력 투입이 동시에 진행되면서 일상적 공간에서의 불심검문과 단속이 광범위해졌고, 이에 맞선 대도시의 대규모 항의 시위와 주 방위군 투입이 겹치며 사회적 긴장은 상수로 굳어졌다.

현재 미국에는 1100만~1200만명의 무자격 체류자가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그중 다수는 불법 월경자가 아니라 합법 입국 후 체류 기간이 만료되었거나 체류 목적이 달라진 이들이다. 행정부 내 강경파는 하루 3000명, 연간 100만명 추방 목표를 거론한다. 조지아주 현대·LG에너지솔루션 합작 배터리 공장 급습으로 한국인 근로자 300여 명을 포함해 500명을 체포하고, 대도시에서 동시다발적 단속을 벌인 것도 ‘할당량 채우기식’ 무리수라는 비판이 나온다. 반면 농장·호텔·식당 등 저임금 노동 현장에 대한 단속은 주춤한데, 해당 분야의 인력 부족이 실물경제에 미칠 악영향을 의식한 결과로 보인다.

최근에는 H-1B 전문직 비자 수수료를 현행 1000달러에서 10만 달러로 대폭 인상해 진입 장벽을 크게 높이고 있다. 외국 전문 인력 유입을 줄여 국내 일자리를 늘리고 수수료 수입을 올리겠다는 계산이지만, 빅테크와 첨단 산업을 뒷받침해온 글로벌 인재 풀을 스스로 축소시키는 역효과가 불가피하다.

지난달 23일(현지시간) 트럼프 대통령은 유엔 총회 연설에서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문제는 통제되지 않는 이민”이라 규정하며, 유럽을 향해 “공통점이 없는 사람들(이민자)의 유입을 막지 못하면 여러분 나라는 망한다”고 경고했다. 트럼프도 오늘날 미국의 번영이 ‘아메리칸 드림’을 좇아 미국으로 건너온 사람들의 꿈에서 출발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행정부가 폭력적이며 인종주의적인 반이민 정책을 강화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강경 이민 정책은 트럼프의 핵심 지지층인 MAGA 진영과 공화당 내 강경파의 정체성 이슈다. 트럼프는 무엇보다 이들을 결집시켜 민주당과 선명한 대립각을 세우는 것이 자신에게 유리한 정치적 구도라고 판단하는 듯하다. 동시에 경기 침체와 제조업 일자리 감소의 책임을 ‘외부자’에게 전가하는 전형적 스케이프고팅(scapegoating) 전략이기도 하다.

미국의 개방적 이민정책은 저비용·고효율의 산업화 노동력, 세계 최고 수준의 연구·교육 생태계, 실리콘밸리의 창업 역동성, 내수와 서비스 수요의 지속 가능성을 동시에 떠받쳐왔다. ‘아메리칸 드림’은 미국이라는 제국의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그러나 미국은 저출산과 다인종 사회의 조정 비용이라는 구조적 도전에 직면해 있다. 고령사회로 접어들면서 출산율(2023년 1.66명)은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있다. 미국에게 이민은 그 취약성을 보완하는 핵심 자원이다. 이런 맥락에서 폭력적이고 배제적인 반이민 정책은 미국 미래 성장의 토대를 스스로 허무는 자기파괴적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은 로마 제국의 길로 가나 


역사학자들은 미국과 고대 로마 제국을 자주 비교한다. 두 나라는 광대한 영토와 다민족 구성이라는 점에서 유사하고, 미국의 건국자들은 민주적 로마 공화국을 이상으로 삼아 나라를 세웠다. 미국의 상징인 독수리는 로마의 군기에서 유래했고, 상원(Senate) 역시 로마의 원로원(Senatus)에서 명칭을 따왔다. 로마 제국은 이탈리아 반도 밖 엘리트를 적극 포용해 시민권을 부여하고 행정·군사·정치 참여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충성심을 확보했다. 이러한 개방과 통합은 광대한 영토를 효과적으로 통치하고 지역 갈등을 줄이며 결속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3세기 이후 정치적 혼란과 부패, 과도한 세금과 인플레이션으로 경제 기반이 무너지고 군사력이 약화되면서 로마는 쇠퇴했다. 내부적으로 계층 간 격차가 심화되며 시민들의 공동체 의식도 붕괴되었다.

오늘의 미국이 직면한 문제는 로마 제국 붕괴를 초래한 요인들과 겹친다. 미국의 힘은 오랫동안 미국 주도의 세계 질서에 기반해 왔지만, 그 질서가 트럼프 재집권 이후 빠르게 흔들리고 있다. 민주주의와 동맹의 가치를 훼손하는 즉흥적이고 위험한 정책들이 연이어 나오며 대내외적 혼란이 가중되고, 전통적으로 대통령 권력을 견제하던 의회·사법부·내부 통제 장치도 사실상 무력화되고 있다. 특히 강경 이민 정책은 인권 논란과 노동시장 불안정까지 촉발하고 있다. 대통령직을 헌법에 의해 제약되는 국가적 책무가 아니라 개인 권력의 도구로 여기는 듯한 통치는 법원과 군, 사법, 교육, 언론을 공격하는 파괴적 행정으로 이어진다. 제조업 부흥을 내세운 고율 관세와 보호무역 정책은 오히려 공급망 불안과 글로벌 무역 전쟁을 촉발해 세계 경제 질서 속 미국의 리더십을 후퇴시키고 있다.

트럼프 재집권 후 미국의 국제적 호감도는 크게 하락하고 있다. 미국이 자랑하던 소프트파워의 약화는 더 치명적이다. 20세기 후반 이후 미국이 초강대국으로 군림할 수 있었던 이유는 군사력이나 경제력만이 아니었다. 미국의 대학은 세계 인재들의 꿈의 무대였고, 할리우드와 팝음악은 국경을 넘어 전 세계를 사로잡았다. 인재 유입의 위축과 문화적 흡인력의 감소가 동시에 진행되는 상황에서 군사·경제력만으로 미국의 제국적 위상을 유지할 수 있을까.

지구촌의 많은 나라들은 미국을 더 이상 ‘매력적인 나라’가 아니라 ‘자기중심적 나라’로 인식하고 있다. 이는 이미지 훼손을 넘어, 미국 패권을 떠받쳐 온 소중한 전략적 자산을 소진시키는 심각한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국제정치에서 ‘신뢰’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핵심 자산이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바뀌는 동맹에 대한 트럼프의 태도, 국제기구와 다자 협정 탈퇴는 미국의 신뢰를 급격히 훼손했다. 이는 서로마 제국 말기 황제 교체기의 혼란을 떠올리게 한다. 황제가 바뀔 때마다 정책과 우선순위가 뒤바뀌어 속주와 군대는 혼란에 빠졌고, 제국은 내부 분열을 감당하지 못했다. 오늘날 나토 동맹국들은 미국이 집단방위 약속을 진정으로 지킬지 불안해하고, 아시아의 파트너들도 워싱턴의 전략적 방향성에 회의적 시선을 보낸다. 초강대국의 신뢰 붕괴는 군사력이나 경제력에 앞서 제국적 위상을 근본적으로 흔드는 요인이다.

트럼프의 가장 큰 적은 트럼프 자신

최근 기고에서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Paul Krugman)은 “미국의 핵심은 1945년 이후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동맹 체계를 유지해왔다는 데 있다”며 이 동맹 체계가 “미국의 경제적 가능성과 전략적 가능성을 엄청나게 증폭시켰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트럼프는 그 모든 것을 내던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가디언의 국제문제 칼럼니스트 사이먼 티스달(Simon Tisdall)은 지난 4월 ‘트럼프와 같은 폭군은 항상 몰락한다’라는 칼럼에서 “트럼프는 탄핵되거나 수정헌법 25조 4항에 따라 직무불능 판정을 받지 않는 한 2029년까지 권력을 쥔다. 예스맨 부통령 JD 밴스가 오벌오피스 문지기를 자처하고, 의회가 MAGA 지지자들로 넘쳐나는 상황에서 이런 절차적 축출은 가능성이 낮아 보인다”고 평가했다. 그는 “트럼프의 가장 큰 적은 트럼프 자신”이라며 “미국과 스스로를 구하려는 이들은 국내외에서 모든 민주적 수단을 동원해 그를 억제하고, 저지하며, 무력화하고, 퇴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지금 당장 가장 밝고도 큰 희망은, 오만에 빠져 허우적대는 트럼프가 스스로를 파괴할 것이라는 점”이라고 결론지었다.

미국은 더 이상 ‘영원한 제국’이 아니다. 불확실성과 신뢰 붕괴, 경제적 기반 약화, 인재 유입 차단, 동맹 체제의 균열, 외부 압력과 내부 혼란의 동시 발생 등은 역사 속 로마와 같은 제국의 몰락을 이끌었던 전형적 징후다. 물론 미국은 여전히 압도적 군사력과 경제 규모를 보유하며 단기간 몰락할 가능성은 낮다. 그러나 제국의 쇠퇴는 대개 내부 균열에서 서서히 진행되다 어느 순간 급격한 전환을 맞는다. 로마 제국이 수세기 동안 약화되다 결국 돌이킬 수 없는 붕괴로 치달았듯, 미국도 트럼프 이후의 시대를 기점으로 새로운 전환기에 들어섰다고 기록될 가능성이 커 보인다.

그러나 역사는 또한 방향을 바꿀 수 있음을 가르친다. 트럼프가 취임사에서 약속한 ‘황금기’를 현실로 만들려면 경계와 장벽이 아니라 규범과 신뢰, 동맹과 개방을 선택해야 한다. 이것이 미국을 다시 매력적인 나라로, 그리고 오래 지속 가능한 초강대국으로 만드는 길일 것이다.


이수완 필자 주요 이력 

▷코리아타임스 기자 ▷로이터통신 선임특파원 ▷로이터통신 편집장 ▷서울외신기자클럽 회장 ▷아주경제 글로벌본부장 ▷아주경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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