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호의 그게 이렇지요] 李대통령의 '엔드 이니셔티브'와 한반도 평화

[이재호 논설고문]
[이재호 논설고문]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23일 유엔총회 연설에서 자신의 평화안인 ‘엔드 이니셔티브(END Initiative)'로 한반도의 냉전을 끝내겠다고 선언했다. END는 교류(Exchange), 관계 정상화(Normalization), 비핵화(Denuclearization) 머리글자다. 이를 통해 평화의 시대를 열겠다는 건데 언뜻 봐서는 과거 정권들의 평화안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어떤 평화안이든 END의 성취 없이 가능하겠는가.
 
그래서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이 세 요소(3 ENDs) 간에 우선순위나 선후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한 듯하다. “세 요소가 각각 하나의 과정으로 상호 추동하는 구조로 추진해간다”는 거다. 한마디로 3 ENDs가 정해진 순서 없이 서로 목표(평화)를 견인해간다는 얘기다. 과거처럼 교류→관계 정상화→비핵화 순으로 단계적으로 고정된 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순서가 뒤바뀔 수도 있다는 거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얘기인데, 이 또한 이재명표 ‘실용’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렇다 보니 말들이 없지 않다. 당장 제기되는 게 핵 문제가 소홀히 다뤄질 수도 있다는 비판이다. 동북아 평화안의 핵심이라 할 ‘핵’ 문제가 제대로 다뤄지지 않고 핵을 3 END 중 하나로 다룬다면 이런 지적이 나올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대통령이 핵에만 매달릴 수도 없는 일이다. 핵 문제 못지않게 중요한 일, 예컨대 남북 관계 개선 같은 일은 당장 해야 한다. 이 대통령이 이 간격을 어떻게 메워갈지 주목된다.
 
이 대통령의 평화 구상에 북이 얼마나 진정성 있게 호응할지 지켜봐야겠지만, 이쯤에서 우리는 그만 인정해야 한다. 우리의 북 핵 대응이 처절히 실패했음을 시인해야 한다. 김일성 일족의 핵에 대한 집념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강했고, 우리는 유행가의 한 대목처럼 ‘그저 바라보기만···’ 했던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런 북에 뭐든 퍼주지 못해 안달을 했다. 퍼주기가 우리에겐 인도주의자, 민족 화해주의자로 평가받는 한 척도였다. 1980~1990년대 남북 대화를 취재했던 기자들이 대개는 경험했던 일화 한 토막을 소개한다.
 
해마다 우리 정부의 새해 예산안이 나오면 판문점에서 만난 북측 기자들은 농담하듯 툭 하고 한마디 던지곤 했다. “너무 짜다. 거, 남북협력기금 좀 팍팍 늘리라우!” 북녘 기자들은 그런 예산이라도 조금 넉넉하게 편성해 달라는 거였다. 물론 농담 섞인 얘기였지만 그런 북한이 지금 핵보유국이 돼 우리를 압박하고 있다.
 
반미(反美) 열풍이 불던 당시 젊은 학생들에게 이런 질문도 자주 했다. 왜 북핵에 반대하지 않는가? 그들이 답했다. “북이 핵을 가지고 있으면 통일됐을 때 그 핵이 결국 우리 것이 되지 않을까요.” 우스갯소리 같지만 당시 일부 세대에게 핵이란 그런 것이었다. 그 핵이 결국 북을 핵 보유국으로 만든 셈이다.

이미 드러났지만 ‘핵 없는 북’을 상상하기란 어렵다. 경제적으로 실패한 정권이 매달릴 수 있는 건 핵뿐이다. 핵에 대한 북의 집착이 시간이 갈수록 강해질 수밖에 없다. 김정은이 최근 남북 관계를 더 이상 통일 지향적 특수 관계가 아닌 적대적 두 국가관계로 규정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핵이 있으니 무엇을 하든 무서울 게 없는 것이다. 반대로 우리는 핵이 없거나, 있어도 쓸 수 없는 제약 때문에 위축될 수밖에 없다.
 
한때 우리 대통령 중 한 분은 관련국들에 대북 제재를 해제해 달라고 간청하고 다녔다. 북측에서 ‘삶은 소대가리’라는 모욕적인 말까지 들으면서 말이다. 대북 제재는 김정은이 위험한 핵 장난을 하지 못하도록 국제사회가 공식적으로 합의한 기본 틀이다. 그런데도 북핵의 피해 당사자이자 한·미 동맹의 한 축인 대한민국 대통령이 앞장서서 그 틀을 깨 달라고 요청하고 다닌 것이다. 이게 논리적으로 가능한가. 그 결말이 오늘 우리가 마주한 ‘핵보유국 북한이 아닌가.

미국은 클린턴 정권(1993~2001년) 때 북한 핵시설에 대해 서지컬 스트라이크(surgical strike)를 계획했다가 포기했다. 서지컬 스트라이크는 북의 핵보유를 막기 위해 북의 특정 지역과 시설을 정밀하게 타격해 외과수술처럼 도려내는 작전이다. 미국은 이를 실행하려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의 반대로 실행하지 못했다는 게 정설이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힘들겠지만 우리의 대북 핵정책은 총체적으로 실패했음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보수와 진보를 떠나 그동안 누구도 북핵 위기의 실체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했다. 과소평가했거나 외면했다. 핵통제위원회도 만들고 그 자리에 믿을 만한 전문가를 앉히기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정교해지고 대담해진 북핵 위협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어떻게 할 것인가.

돌이켜보면 2020년 6월 16일 북측에 의해 자행된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사건이 남북 관계 악화의 한 분수령이었다. 북은 이날 제1차 남북정상회담 및 제7차 남북고위급 회담 합의에 따라 남측 부담으로 우리 측이 개성시에 지어진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했다. 우리 국민의 혈세 수백억 원이 일거에 재로 변했다.
 
남북 관계는 일시에 얼어붙었다. 북이 이처럼 과격한 반응을 보인 것을 두고 ‘대북전단’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대북전단을 날리지 않았다면 북이 과연 우리에 대한 적대적 시선을 거두고 핵 개발도 중단했을까. 어림없는 소리다. 그럴수록 더 핵에 집착해온 게 김씨 일족과 북한이다.
 
이제 남북 관계는 한때나마 존재했던 온기와 활력을 잃고 냉랭하고 적대적인 관계로 변했다. 이런 흐름 속에서 2018년 6월 싱가포르에서 열린 사상 최초의 북·미 정상회담과 2019년 2월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제2차 정상회담이 김정은에게 날개를 달아줬다. 김정은은 말 그대로 국제사회에 무혈입성’했다. 그게 핵의 위력이다.
 
우리는 이런 핵 딜레마에서 어떻게 빠져나올 것인지, 실로 지난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흔히 핵에는 핵으로 맞설 수밖에 없다고들 한다. 동의한다. 무슨 얘기를 해도 핵 잠재력을 키우는 수밖에 없다. 우리도 최소한 일본 수준으로 핵연료를 재처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게 최우선의 과제다.
 
조현 외교부 장관은 지난 9월 22일 언론 인터뷰에서 “우라늄 농축과 사용 후 핵연료 재처리 제안을 완화하는 방향으로 미국과 기본 방향에 합의했다”고 밝혀 한 가닥 희망을 갖게 한다. 이 밖에도 철수시킨 미국의 전술핵무기를 다시 들여오거나, 무장된 미국 핵잠수함이 우리 해협에 항상 떠 있도록 하는 등 대안이 있을 수 있다. 그 잠수함과 지상군 사이에 다양하고도 내밀한 협력이 이뤄지고 이게 주된 억지력으로 기능할 수도 있다.
 

▷고려대 정치학 박사 ▷동아일보 정치부장 ▷동아일보 논설실장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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