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한우 단국대 베트남학전공 초빙교수]
베트남 경제가 성장하며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중산층이라고 할 만한 계층이 두꺼워지고 중산층 이상의 부자 수도 계속해 늘고 있다. 이렇다 보니 여유 자금을 가진 사람들은 부동산, 주식 등 투자처를 찾는다. 그간의 실적으로 보면 베트남에서도 돈 버는 길은 역시 부동산이었다. 집값이 지난 10년 새 열 배 뛰었다는 말이 여기저기서 들린다. 물론 하노이와 호찌민시의 경우다. 이제 부동산이 예전처럼 큰 수익을 내지는 못하는 시기로 접어들었다. 주식 투자 인구도 늘었다. 하지만 베트남 주가 변동이 심해 주식이 아직 안정적 투자처는 아닌 상황이다. 부유층 사람들은 다른 투자처로 눈을 돌린다. 예술품 시장이 그중 하나다. 사람들은 골동품 등 고미술품을 구입하기도 하지만 미술작품 특히 근현대 회화작품을 구매하기도 한다. 얼마 전부터 베트남 회화작품에 관심을 보이는 외국인도 부쩍 늘었다. 우리는 근래에 소더비 또는 크리스티 같은 국제 경매시장에서 베트남 출신 작가의 작품 가운데 어떤 작품이 최고가에 팔렸다는 소식을 자주 접한다. 이런 상황에서 베트남 미술품에 대해 알아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인도차이나미술학교와 근대 서양 미술의 도입
베트남에 근대 서양 회화가 들어온 후 초기에 작품활동을 하던 작가들의 작품이 주목을 받고 있다. ‘포-트-르우-담(Pho-Thu-Luu-Dam)’으로 일컬어지는 네 화가가 그들이다. 즉 레포(Le Pho), 마이쭝트(Mai Trung Thu), 레티르우(Le Thi Luu), 부까오담(Vu Cao Dam)이다. 이들은 인도차이나미술학교 초기 졸업생들이다. 인도차이나미술학교는 프랑스인 화가 빅토르 타르디유가 베트남인 화가 남선(Nam Son)과 협력하여 1925년 하노이에 세운 학교다. 베트남에 유럽 미술 기법을 도입하는 데 주요한 역할을 했다. 제1기 입학생은 응우옌판짜인(Nguyen Phan Chanh), 레포, 마이쭝트 등이다. 제2기 입학생에 부까오담, 또응옥번(To Ngoc Van) 등이 있다. 제3기 레티르우, 제4기 응우옌자찌(Nguyen Gia Tri), 응우옌뜨엉런(Nguyen Tuong Lan) 등이 많이 알려진 화가들이다. 제5기까지 입학생이 1920년대 후반에 입학한 작가들이다. 베트남 내에서는 4대 화가로 ‘찌-번-런-껀(Tri-Van-Lan-Can)’, 즉 응우옌자찌, 또응옥번, 응우옌뜨엉런, 쩐반껀(Tran Van Can)을 들기도 한다. 이들이 베트남에 남아 작품활동을 했기에 베트남 미술계에서 더 존중받는 것 같다. ‘포-트-르우-담’ 화가들은 프랑스 파리로 가서 작품활동을 했기에 해외에 비교적 많이 알려졌다. 당시 대부분 화가들은 유화를 그렸으나 응우옌자찌는 주로 래커(옷칠) 그림 작업을 했다.

-소더비와 크리스티에서 각광받는 베트남 출신 화가들
근래에 베트남인 화가들의 작품이 국제 경매시장에서 호평을 받고 있는데,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응우판짜인의 한 작품이 홍콩 크리스티에서 2018년에 670만 홍콩달러(약 12억원)에 거래됐으며, 2019년에는 다른 작품이 44만 미국달러(약 6억원)에 팔렸다. 또응옥번의 1932년 작품 '두 소녀'는 2019년에 912만5000홍콩달러(약 16억원)에 거래됐다. 또응옥번과 응우옌자찌의 작품을 미술품시장에서 만나기는 쉽지 않다.
해외 미술품 시장에서 거래 소식이 많은 작가는 레포와 마이쭝트다. 홍콩 크리스티에서 레포의 90.5x180.5㎝ 크기의 '누드' 작품이 2019년에 1092만5000홍콩달러(약 19억원)에 거래돼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프랑스 아귀트(Aguttes) 경매에서는 91x71㎝ 크기의 '모란과 함께 있는 소녀' 그림이 2020년에 116만 유로(약 19억원)에 거래됐다. 홍콩 소더비에서도 28.5x41㎝ 크기의 '소녀' 그림이 2022년에 327만6000홍콩달러(약 5억원)에 거래됐다. 마이쭝트의 작품도 호평을 받고 있다. 그의 '누드' 그림이 홍콩 소더비에서 2019년에 396만5000홍콩달러(약 7억원)에 거래됐다. 2021년에는 '마담 프엉' 그림이 2437만5000홍콩달러(약 43억원)에 거래돼 국제 경매시장에서 거래된 베트남 작가들의 작품 중 최고가 기록을 남겼다.

이 밖에도 부까오담의 작품도 호평을 받고 있다. 그의 60x48㎝ 크기의 '어머니와 아이' 그림은 홍콩 크리스티에서 2018년에 27만5000홍콩달러(약 5000만원)에 거래됐다. 46x38㎝ 크기의 작품 '백마(Le Cheval Blanc)'는 2024년 홍콩 경매에서 약 41만 홍콩달러(약 7300만원)에 거래됐다. 레티르우가 1960년에 그린 한 작품은 소더비 경매에서 약 53만 유로(약 8억5000만원)에 거래됐다.
1931~1940년 인도차이나미술학교 입학생 중 잘 알려진 화가로 1931년 제7기 입학생 쩐반껀, 1940년 제14기 응우옌상(Nguyen Sang) 등이 있다. 쩐반껀의 1943년 작품 '여동생 투이(Em Thuy)'는 지금 하노이에 있는 베트남미술박물관에 전시되어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쩐반껀의 작품 '꿈'이 아귀트 경매에서 2024년에 약 37만 유로(약 6억원)에 거래됐다고 한다. 그 밖에 해외 미술품 시장에서 많이 회자되는 이 시기 작가는 드문 듯하다. 대체로 보면 부까오담 외에 1920년대 인도차이나미술학교 입학생들의 작품 가격은 10억원을 넘으며, 1930년대 입학생들의 작품 가격은 10억원을 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베트남 격변 속의 화가들
1941년 이후 인도차이나미술학교 입학생들은 베트남 내 정치적 격변으로 인해 제때 졸업하지 못했다. 프랑스와의 전쟁이 이들을 가로막았다. 프랑스와의 전쟁 이후에는 1954년 분단 및 북베트남의 사회주의 건설, 남북 간의 전쟁 및 미국과의 전쟁이 이어졌다. 전쟁과 사회주의 혁명 시기에 화가들 대부분은 전쟁의 승리를 기원하고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기반한 그림을 그렸다. 이 당시에 순수 예술을 추구한 화가들은 소수였다. 이들 중에는 제15기 부이쑤언파이(Bui Xuan Phai), 응우옌뜨응이엠(Nguyen Tu Nghiem), 제18기 즈엉빅리엔(Duong Bich Lien) 등이 있었다. 이들이 전쟁과 혁명에 관한 그림을 전혀 그리지 않은 것은 아니나 순수 예술을 지키려 했다. 1940년대 입학생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화가는 부이쑤언파이다. 그는 하노이 옛 거리(pho co)를 많이 그린 대표적 화가다. '[부이쑤언]파이의 거리(pho Phai)'라는 용어가 만들어질 정도였다. 나는 '하노이 사람과 거리를 그리고 또 그리다'라는 제목의 칼럼으로 그의 생애를 소개한 바 있다. 즈엉빅리엔의 작품 중 '박 호'(호찌민)는 베트남미술박물관에 걸려 있다.

인도차이나미술학교는 제18기까지 입학생을 받았다. 이후 현대 베트남의 격변기에 베트남 화가들이 ‘항전학급’을 운영했고 이후 또응옥번이 미술학교의 책임을 맡았다. 베트남이 독립한 후에는 하노이미술대학이 이를 대신하게 됐다. 항전학급 출신으로 쩐르우허우(Tran Luu Hau), 레람(Le Lam) 등이 잘 알려져 있다. 쩐르우허우는 1950~1953년 ‘항전미술학교’에서 또응옥번 등의 지도를 받았다. 그는 굵은 붓 터치로 풍경이나 화병, 화분 등 정물을 생동감 있게 그렸다. 레람은 베트남전쟁 시기에 미군 장갑차를 막아서는 베트남 여인을 그린 '정지'라는 제목의 그림으로 유명하다. 최근에 쩐르우허우의 작품이 애호가들에게 호평을 받고 있다.
오래전부터 베트남 미술작품을 거래한 갤러리 포커스 및 93 뮤지엄 구삼본 관장은 지난 10년 사이에 베트남 화가의 작품 값이 대폭 뛰었다고 했다. 베트남에서 사온 작품을 베트남인들이 도로 사가기도 한다고 했다. 실제로 그는 10여 년 전에 산 쩐르우허우의 작품을 최근 베트남인 사업가에게 살 때보다 열 배 높은 가격으로 팔았다고 한다.

-개혁 시대에 활약하는 화가들
베트남이 1986년 말 ‘도이머이(Doi Moi·쇄신)’를 부르짖으며 개혁에 나서기 시작했다. 정부의 개혁정책은 문화계에도 봄바람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문학 작가들에게 자유공간을 확대했고, 화가들에게도 자유로운 활동의 기반을 마련했다. 당시 화단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킨 화가들이 하노이의 '갱 오브 파이브'였다. 하찌히에우(Ha Tri Hieu), 쩐르엉(Tran Luong), 홍비엣중(Hong Viet Dung), 팜꽝빈(Pham Quang Vinh), 당쑤언호아(Dang Xuan Hoa)가 그들이다. 1960년 전후에 출생한, 당시로서는 비교적 젊은 화가들이 그 이전의 조류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작업을 추구했다. 이들보다 선배 세대인 1940년대생인 팜륵(Pham Luc), 타인쯔엉(Thanh Chuong) 등도 활발히 작품활동을 해왔다. 1960년대 이후 출생한 꽈익동프엉(Quach Dong Phuong), 레낀따이(Le Kinh Tai) 등 상대적으로 젊은 세대 화가들이 다양한 작품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제 베트남 미술품에 관심을 가져 볼 때다.
필자 주요 약력
▷서강대 정치학박사 ▷서강대 동아연구소 및 대학원 동남아시아학 협동과정 교수 역임 ▷한국-베트남 현인그룹 위원 역임 ▷현 단국대 아시아중동학부 베트남학전공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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