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병서 중국경제금융연구소장]
중국 기술혁신의 실체, ‘필패(必敗)’가 아닌 ‘필패(必覇)’의 길
그간 서방 세계는 중국의 과학기술 발전을 평가절하해왔다. "사회주의 체제는 창의성의 무덤"이라는 서구의 고정관념은 오랜 시간 중국의 혁신 역량을 폄하하는 데 일조했다. 특히 2000년대까지 중국의 기술 진보는 외국 기술의 단순 모방, 복제품 중심의 제조에 머물렀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2020년대 들어 이러한 인식은 근본적으로 뒤바뀌고 있다.
중국은 전기차, 배터리, 태양광, 드론, 로봇 등에서 글로벌 1위, 세계 10대 전략 기술산업 중 7개 부문에서 최대 생산국으로 자리잡았다. 이는 단순한 수치의 경쟁을 넘어서 기술력, 산업 생태계, 글로벌 표준화, 시장 지배력 등의 다양한 측면에서 중국이 ‘레드 테크(Red Tech)’로 불리는 새로운 과학기술 권역을 만들어내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 중심에는 중국 정부의 전략적 집중력과 체계적 산업 육성 정책이 있다. 국가 중장기 과학기술 발전계획(2021~2035 과기강국 전략)에 따라, 연간 GDP의 약 2.5% 이상을 R&D에 투자하며 세계 2위 규모의 연구개발 지출을 기록하고 있다. 또한 수백 개의 국가 중점실험실, 중대 과학기술 프로젝트, 수백만 명의 이공계 박사, 유학생 귀국자들이 중국 내 산업현장에 투입되고 있다.
중국은 인구 구조가 고령화로 접어들어 '인구 보너스'는 끝났지만, 연간 1200만 명 이상의 대졸자가 배출되는 '인재 보너스'는 여전히 유효하다. 고급 인재의 질적 향상과 산업계 흡수율도 점점 높아지고 있다. ‘중국제조 2025’와 ‘쌍순환(雙循環) 전략’은 내수시장을 축으로 한 독자 기술 생태계를 구축하려는 의도를 반영한다.
중국을 피크로 본 오판과 한국의 대응 전략
한국은 한동안 중국을 기술 후진국 또는 베끼기의 나라로 규정하며 전략적으로 과소평가해왔다. 특히 미·중 기술패권 경쟁이 본격화된 이후에는 중국 경제를 피크아웃(Peak-out)한 국가로 간주하며, 중국과의 기술 경쟁을 일시적 위협으로 여기는 경향이 강했다. 그러나 이 같은 인식은 현실과 괴리가 크다.
중국은 4차 산업혁명의 종합 실험장으로 변모했다. AI의 사회적 응용 수준, 핀테크 확산, 무현금 결제, 스마트 도시 인프라, 산업용 로봇 활용 등은 이미 한국보다 앞서 있다. 중국 기업은 국내 시장을 디지털 전환의 테스트베드로 삼아 빠르게 제품을 상용화하고 있으며, 글로벌 시장으로 확장하고 있다.
중국은 이제 '피크론'이나 '붕괴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강력한 과학기술 혁신 동력을 가진 '불을 뿜는 용'이다. 한국은 중국의 변화를 정확히 인지하고, 과거의 시각에서 벗어나 냉철하고 전략적인 대응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중국은 자국 중심의 R&D 생태계 'In China, For China' 전략을 통해 외자기업에도 현지화된 연구개발, 마케팅, 유통망을 요구하고 있다. 한국 기업도 단순한 생산기지 차원이 아닌, R&D부터 마케팅, 유통까지 완전한 ‘중국화 전략’을 수립할 필요가 있다. 특히 알리바바, 징둥, 틱톡 등의 로컬 플랫폼과의 협력 강화, 현지 콘텐츠 기반 마케팅, 사용자 피드백 기반 제품 개선 프로세스를 내재화해야 한다.
한국 기업이 과거에 중국에 중간재를, 미국에는 완제품을 공급하던 시대도 끝나고 있다. 미국의 'Made in USA'와 중국의 '소비 중심 성장'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 속에서, 이제는 미국에는 중간재·부품 기반 공급망 전략을 강화하고, 중국에는 소비재 및 융합형 스마트 제품 공급을 확대하는 공급망 재설계가 시급하다.
또한 중국의 고급 소비층은 품질과 브랜드를 동시에 중시하며, 중국은 한국의 뷰티, 건강가전, 스마트 가전 등에서 높은 성장 잠재력을 가진 시장임을 인식해야 한다. 이제는 중국 시장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고, 효과적인 대중 협력 모델을 구축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국, 기술패권의 '기회의 창'을 놓치지 말아야
중국은 현재 ‘AI+제조’ 모델을 통해 고부가가치 산업으로의 전환을 가속화하고 있다. 제조 현장에 AI, 클라우드, 빅데이터를 적용해 생산성과 효율성을 극대화하고 있으며, 이러한 혁신은 기존의 가격 경쟁력에 기술력이 결합된 형태로 진화 중이다. 이는 한국 기업에게 위협이자 기회가 된다.
한국은 반도체, 정밀기계, 바이오, 메디칼 등의 분야에서 중국보다 높은 고부가가치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중국과의 전략적 파트너십은 경쟁을 줄이고 협력을 확대할 수 있는 창구다. 예를 들어 AI 반도체 설계, 차세대 배터리 소재, 의료기기 등 분야는 상호 보완적 관계로 접근 가능하다.
또한 양국은 ‘기술 디커플링’을 피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도 공동 연구센터 설립, 국제공동특허, 글로벌 학회 및 표준화 협력 등을 통해 제한적 협력 공간을 확대해야 한다. 아울러 한·중 간 인재 교류, 청년 스타트업 지원, 창업 인큐베이팅 플랫폼 공유 등은 장기적인 기술 우호관계 형성에 도움이 된다.
한국 정부와 기업은 중국을 단순한 경쟁국 또는 위험국가로만 인식하기보다는, 전략적 협력 대상이자 기술 동반자로 설정할 필요가 있다. 견제와 포용, 경쟁과 협력이라는 이중 전략이야말로 미래 한·중 기술관계의 핵심이다.
중국은 더 이상 기술 모방국이 아니라 주도국이다. 산업정책, 디지털 인프라, 고급 인재, 그리고 방대한 내수시장이라는 4대 요소를 바탕으로 “레드테크 생태계”를 구축해가고 있다. 이러한 중국의 혁신 시스템은 서구식 자유시장 모델과는 다른 방향에서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다.
한국은 이러한 변화에 수동적으로 대응해서는 안 된다. 전략적 공급망 재편, 기술 파트너십 재설계, 중국 시장 맞춤형 제품 및 전략 개발 등 전방위적인 대응 전략이 필요하다. 동시에 미국 중심의 기술 동맹과의 균형을 유지하면서도, 중국과의 기술 생태계에서 지속 가능한 입지를 확보해야 한다.
과거 한국이 일본을 추격하던 시절의 교훈처럼, 중국 역시 이제 ‘도전자가 아닌 경쟁자’이며, 때로는 협력자로 변모할 수 있다. 한국은 냉정하고 현실적인 전략으로 중국 기술혁신의 본질을 파악하고, 그 속에서 “기회의 창”을 열어야 한다.
전병서 필자 주요 이력
▷칭화대 석사·푸단대 박사 ▷대우경제연구소 수석연구위원 ▷반도체IT 애널리스트 ▷성균관대 중국대학원 겸임교수 ▷중국경제금융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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