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로화와 위안화가 글로벌 기축통화로서 부상할 가능성이 부각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변덕스러운 관세 정책과 신용등급 하락 등 악재가 겹치며 달러에 대한 신뢰에 균열이 생기면서다. 유럽과 중국은 달러 위상이 흔들리는 틈을 타 자국 통화의 위상을 끌어올리겠다는 야심을 드러내고 있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는 26일(현지시간) 독일 베를린에서 한 연설에서 “현재 일어나는 변화는 ‘글로벌 유로 시대’를 열어주고 있다”며, 유로화가 국제무역의 글로벌 기축통화로서 달러의 대안이 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됐다고 말했다. 그는 세계 경제의 개방성과 다자간 협력이 보호주의와 힘의 경쟁으로 대체되고 있다며 “이 체제를 떠받치는 달러의 지배적 역할에 대한 불확실성도 제기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유럽의 운명을 더욱 강력하게 자기 주도로 이끌어갈 기회”라며 “이는 단순히 주어지는 특권이 아니고 우리 스스로 얻어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실제 달러 가치는 트럼프 행정부의 변덕스러운 관세 정책으로 인한 신뢰도 추락으로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6개 주요 통화 대비 달러 가치를 나타내는 달러인덱스는 지난달 100선 아래로 떨어진 가운데 2022년 4월 이후 3년래 저점 근처에서 움직이고 있다. 달러 대비 유로화 가치는 올해 들어 약 10%가량 상승했다. 연초 1.03달러였던 달러·유로 환율은 1.1398달러 수준이다. 각국 외화준비금에서 달러가 차지하는 비중은 1994년 이후 최저치인 58%(작년 3분기 기준)까지 떨어졌다.
다만 라가르드 총재는 불안감에 휩싸인 투자자들이 최근 달러 비중을 제한하고 있다면서도, 직접적인 대안은 찾지 못한 채 금을 선택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유로화가 각국 외화준비금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로 여전히 달러를 한참 밑돈다. 그는 유로화가 달러의 대안이 되기 위해서 글로벌 무역에서의 역할을 확대함과 동시에 △강력한 군사동맹 등 지정학적 기반 △경제개혁과 자본시장 통합 등 경제적 기반 △EU의 정치적 단합 등 법적 기반 등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달러 위상 약화를 유로화 위상 강화의 기회로 적극 활용하겠다는 것이다. 블룸버그는 라가르드 총재의 이날 발언에 대해 “글로벌 무역과 미국 기관에 대한 트럼프 대통령의 공격을 자신들(유럽)에게 유리하게 이용하려고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기회를 노리는 것은 EU뿐만이 아니다. 중국 역시 달러 위상 약화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주요 정책 목표 중 하나인 ‘위안화 국제화’에 박차를 가할 수 있는 기회로 보고 있다. 중국 중앙은행인 인민은행은 최근 은행 거시건전성평가(MPA) 조정의 일환으로 위안화 표시 무역 거래 비율의 하한선을 기존 25%에서 40%로 올린 것으로 알려졌다. 국제 무역 거래 시 위안화 사용 비율을 높이라고 주요 은행에 요구한 것이다. 중국 당국은 지난달 중국 주도 국제 결제 시스템인 ‘국경 간 위안화 지급 시스템’(CIPS)의 기능을 강화한다는 계획도 발표했다. 달러가 아닌 자체 통화와 지불 시스템으로 처리하는 거래를 더 늘리겠다는 구상이다. 경기 둔화 우려에도 달러·위안 환율은 올해들어 1.7% 상승했다. 골드만삭스는 향후 12개월 위안화 환율 전망치를 달러당 7위안으로 제시하며 위안화 강세가 지속될 것으로 내다봤다.
이 외에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의 래리 핑크 최고경영자(CEO)는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가 비트코인 같은 디지털 자산에도 위협받을 수 있다고 경고한 바 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달러 패권이 쉽게 무너지진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달러 영향력이 일부 축소되고 각국 외화준비금에서 달러가 차지하는 비중이 계속해서 하락하겠지만, 1위 자리는 유지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영국 사모펀드인 유리존 SLJ 캐피탈의 스티븐 젠 최고경영자(CEO)는 “달러는 여전히 지배적인 기축통화다.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최근의 달러 약세에 불길한 징조는 전혀 없다”면서 “달러는 지난 25년 동안 유로화 대비 약 0.83달러~1.60달러 사이에서 거래됐으며 이 기간 동안 달러가 기축통화나 국제통화로서의 패권적 지위를 상실한 적은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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