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칼럼] 법과 정의가 밥 먹여 주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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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수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장영수 교수(헌법학)
입력 2023-12-28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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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장영수 교수헌법학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장영수 교수(헌법학)]



 
“왜 법과 정의를 공부해야 하나요? 저는 법 없이도 살 사람인데.”
가끔 학생들에게 받는 질문이다. 뭐라고 답해야 할까? 현대사회의 복잡한 현실, 갈등, 그리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규범체계를 설명하고, 법이 없으면 사회질서의 유지가 어렵다고 말해야 할까? 아니면 인류의 역사 속에서 확인된 바 있는, 법이 없는 무법천지의 위험성을 이야기해야 할까? 법과 정의가 밥 먹여 주나요?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장영수 교수(헌법학)
 
아무래도 법의 복잡한 체계와 기능을 설명하는 것보다는 정의로운 사회질서를 위해 법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이 간단한 설명이 될 것인데, 이제는 도대체 정의가 무엇인가 라는 더욱 난감한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혼란스러운 사회일수록 정의에 대한 관심은 높다. 그런데 사회가 혼란스럽다는 것은 정의의 기준이 흔들리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의에 대한 높은 관심이 답을 얻기는 더욱 어렵다. 이제 자문(自問)해 보자. 지금 우리 사회는 혼란스럽고, 정의의 기준이 흔들리고 있는가?
신(神)의 말씀으로부터 나오는 정의를 추구하던 서구의 중세, 자연법칙에 유사한 자연법적 정의를 추구하던 근대 초와는 달리, 현대의 정의는 인간의 존엄에 기초한 인간의 정의로 이해된다. 그런데 인간의 존엄 및 그로부터 파생되는 인권을 중심으로 정의를 이해하자니, 정의에 대한 혼란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정의란 특별한 것이 아니다. 무엇이 옳으냐에 대한 갈등과 대립이 있을 때, 이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 것이 정의다. 그런데 인권을 정의라고 인정할 때, 인권 상호 간의 충돌이라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라는 매우 복잡한 문제들이 대두된다.
한쪽에서는 언론의 자유를 주장하고, 다른 쪽에서는 언론의 오남용에 의한 명예권 침해를 들어서 반박한다. 한쪽에서는 집회⋅시위의 자유를 주장하고, 다른 쪽에서는 주거의 평온을 강조하는 등 인권의 충돌은 매우 복잡하고 다양하다.
그런 가운데 인권 충돌의 조율⋅조정은 이른바 실제적 조화의 원칙에 따라 어느 한쪽이 절대적으로 우선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기본권을 동시에 최대한 보장할 수 있는 방향으로 행해지는 것이 원칙이다. 예컨대 언론의 자유와 명예권이 충돌할 경우, 어느 한쪽이 절대적 우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진실에 부합하고 공익을 위한 언론의 경우에는 명예권에 우선하되, 허위이거나 음해 목적의 언론에 대해서는 명예권의 보호가 우선하도록 함으로써 양자의 균형점을 찾는 것이다.
 
이러한 원칙과 기준에도 불구하고 정의에 대한 혼란이 여전히 큰 것은 크게 세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정의의 판단 기준에 대한 다툼이 끊이지 않는다. 예컨대 야간옥외집회의 제한에 관한 최근 집시법 개정 논의에서 나타나듯이 야간옥외집회를 허용함으로써 집회⋅시위의 자유를 더욱 강하게 보장하는 법익과 그로 인해 침해되는 주변 시민들의 인권 중에서 어느 쪽이 더 우선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고, 이는 법개정에 대한 찬반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둘째, 시대 변화에 따라 무엇이 정의로운 것인지를 판단하는 기준의 변화가 필요한 경우도 적지 않은데, 이런 경우에 크고 작은 마찰이 발생한다. 예컨대 독재정권 하에서 사실상 저항권의 성격을 갖고 있었던 집회⋅시위와 민주화 이후의 집회⋅시위는 그 성격과 행사방법 등에서 차이가 분명함에도 민주화 이후에도 집회⋅시위문화의 개선에는 많은 갈등과 노력을 피할 수 없었다.
셋째, 개인적 또는 집단적 이해관계로 인해 정의의 기준을 흔들려는 사례도 적지 않다. 여당일 때와 야당일 때의 주장이 180도 달라지는 경우가 드물지 않고, 개인 비리가 문제될 때, 이전의 말을 번복하는 사례들은 그 대표적 예가 될 것이다.
결국 무엇이 정의냐를 판단하는 일차적 기준은 법이지만, 그 법의 제정(입법)과 법에 따른 판단(사법)도 결국 인간의 손에 맡겨져 있기 때문에 끝없는 논란이 계속되는 셈이다.
 
그러면 인류 역사 속에서 정의는 어떻게 발전해 왔는가? 크게 두 가지 관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인류 역사의 경험을 통해 절대로 침해되지 말아야 할 근본가치에 대한 범인류적 공감대가 형성되었다는 점이다. 인류 보편의 가치로 인정되는 인권 및 인권보장을 위해 필요한 민주주의, 법치주의의 핵심요소들은 다수에 의해서도 침해되어서는 안 될 근본가치, 공동의 기초, 정의의 실체적 내용으로 인정되고 있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절차적 정당성을 통해 잠정적 정의를 확인하는 방법의 발전이다. 합리적인 입법절차, 행정절차, 사법절차를 통해 결정된 것은 차후에 새로운 판단에 따라서 변경될 때까지 일응 정당한 것, 정의로운 것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절차적 정의의 성공 여부는 입법절차와 행정절차 및 사법절차에 대한 국민의 신뢰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오늘날 정의는 완벽한 것도, 완성된 것도 아니다. 다만, 실체적 정의와 절차적 정의의 조화 속에서 인류 역사를 통해 검증된 실체적 정의는 다수에 의해서도 침해될 수 없는 것으로, 그밖의 문제들에 대해서는 다수의 지지와 합리적 절차에 의해 정해진 것을 잠정적 정의로 인정하는 것이 현대 민주적 헌법국가의 정의에 대한 기본 태도이다.
정의는 결코 저절로 성장하지 않는다. 다수의 국민들이 더 많은 정의를 갈구하며, 이를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할 때, 정의롭기 위해 개인의 무리한 욕심, 남을 해칠 수도 있는 욕심을 내려놓을 때, 정의가 조금씩 더 성장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법과 정의는 사회적 약자를 보호할 뿐만 아니라, 선량한 사람을 보호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법 없이도 살 사람’이야말로 오히려 법과 정의의 보호를 가장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사람이다.
 
이제 학생의 질문에 답해 보자. 왜 법과 정의를 공부해야 하느냐고? 그건 자네가 법과 정의를 직업적 장래의 도구로 생각하지 않을 때, 분명해질 것이네. 법률가들에게 법과 정의는 직업적 소명이자 생계의 수단일 수 있지만, 다른 사람들과의 갈등으로 인해 곤란한 처지에 빠진 수많은 일반 시민들에게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네.
“법과 정의가 여러분에게 밥 먹여 주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의 밥그릇을 부당하게 빼앗으려 할 때, 그것을 막아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법과 정의입니다.”


필자 주요 이력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비상임위원 △ 경찰청 인권위원회 위원장 △전 국회 개헌특위·정개특위 등 자문위원 △전 대법원  사법정책연구원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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