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다이의 브랜드이야기] 말안장 만들던 '에르메스' 명품 상징이 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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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다이 기자
입력 2023-11-02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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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구용품 판매하던 에르메스, 가방과 의류 사업으로 확장

  • 상징적인 제품으로 자리…오렌지 박스와 실크 스카프·타이

  • 수작업으로만 가방 제작…명품으로 독보적 명성 이어간다

에르메스 로고 사진에르메스
에르메스 로고 [사진=에르메스]
“OO계의 에르메스.”
 
프랑스에서 시작된 명품 브랜드 ‘에르메스(Hermès)’는 명품 중에서도 최상위 명품 브랜드의 대명사로 불린다. 수천만원대를 호가하는 제품과 오렌지색 박스는 에르메스의 '상징'이 됐다.

에르메스는 '오렌지색 박스만이라도 갖고 싶다'는 생각을 들게 할 만큼 명품을 갈망하는 이들의 로망으로 자리잡았다. 가방을 사려면 수개월을 기다려야 하는 것은 물론, 구매 내역이 있어야만 제품을 살 수 있다는 그 '희소성'은 에르메스의 가치를 높이는 데 일조했다. 
 
하지만 에르메스는 반전의 역사를 갖고 있다. 처음부터 최상위 명품 브랜드로 이름을 떨쳤던 것도 아니요, 창업 초기에는 의류나 가방을 만들던 패션 회사도 아니었다.

이 브랜드는 가죽으로 말의 안장과 마구용품을 만들어 판매하던 '마구장'으로 시작했다. 
 
알프레드 드뤼ALFRED DE DREUX 에밀 에르메스 컬렉션 사진에르메스
알프레드 드뤼(ALFRED DE DREUX), 에밀 에르메스 컬렉션 [사진=에르메스]
 
가죽으로 마구용품 만들던 에르메스, 패션으로 사업 확장
에르메스의 역사는 1837년 19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티에리 에르메스(Thierry Hermès)가 프랑스 파리에 마구용품을 만들던 공방을 연 것으로 에르메스의 태동이 시작됐다. 지금 에르메스 브랜드 이미지에 '마차'가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에르메스는 마구상을 하던 시절에도 이미 수준 높은 가죽 가공 실력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1867년에는 파리 만국 박람회에서 1등을 수상하기도 했다.
 
에르메스의 마구용품은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고 전 세계 왕실과 귀족들에게 납품을 하기에 이르렀다. 티에르 에르메스의 아들인 샤를 에밀 에르메스(Charles-Emile Hermès)는 공방을 포부르 생토노레 24번가로 이전하고 그곳에 매장을 열었다. 그는 에르메스의 상징과도 같은 이곳에서 마구와 안장을 주문 제작했다.

1900년대 초반부터는 3세 경영이 시작됐다. 티에르 에르메스의 손자인 에밀 에르메스(Émile Hermès)가 사업에 뛰어든 것이다. 당시 에밀 에르메스는 미국에서는 자동차 산업이 발달하는 것을 보고 여행산업이 성장할 것으로 예상했고, 가방과 벨트, 장갑, 옷 등 부티크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실크 스카프 ‘쥬 데 옴니버스 에 담 블랑쉐Jeu des omnibus et dames blanches’ 사진에르메스
실크 스카프 ‘쥬 데 옴니버스 에 담 블랑쉐(Jeu des omnibus et dames blanches)’ [사진=에르메스]
 
최초의 지퍼 가방 ‘볼리드 백’ 통해 패션업계에 ‘지퍼’ 사용 확산
에르메스에는 ‘최초’라는 수식어가 많이 붙는다. 1922년 캐나다 여행 중 군용 차량 후드의 미국식 개폐장치(오늘날 ‘지퍼’)에 매료된 에밀 에르메스는 이에 대한 독점권을 얻고 이를 에르메스 가방에 도입하게 됐다. 이것이 최초의 지퍼백 ‘볼리드 백’이다.
 
1937년에는 승마용 블라우스에서만 쓰던 실크를 활용해 ‘쥬 데 옴니버스 에 담 블랑쉐(Jeu des omnibus et dames blanches)’라는 이름의 스카프를 만들었다. 그렇게 최초의 실크 스카프가 탄생했다. 1949년에는 최초의 실크 타이를 제작하기도 했다. 
 
에르메스 박스 사진에르메스
에르메스 상징인 오렌지색 박스. [사진=에르메스]
 
‘오렌지 박스’와 ‘켈리백’… 순간의 선택, 오늘날의 에르메스로 
그뿐이 아니다. 1951년에는 에르메스의 상징과도 같은 ‘오렌지 박스’가 세상에 나왔다. 2차 세계 대전 후 황폐해진 유럽은 물품과 자원이 턱없이 부족했다. 종이상자를 만드는 제조업자들도 상황은 비슷했다. 이에 당시 인기가 없던 오렌지색 종이만 남아 있었는데, 당시 에르메스를 이끌던 로베르 뒤마(Robert Dumas)는 과감하게 오렌지색 종이를 도입했고, 이것이 오늘날 에르메스의 시그니처 컬러로 자리잡게 됐다. 
 
1956년에는 ‘켈리백’이 탄생했다. 당초 승마용 안장과 액세서리 보관 용도로 디자인됐었다. 이후 모나코 공주이자 여배우인 그레이스 켈리가 임신 중 파파라치로부터 배를 보호하기 위해 이 가방으로 볼록한 배를 가린 사진이 라이프 매거진 커버를 장식하면서 많은 여성에게 인기를 얻게 됐고, 켈리백이란 이름으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에르메스의 또 다른 아이콘 ‘샨다르크’ 은팔찌도 로베르의 손에서 탄생했다. 로베르는 바닷가에서 우연히 부둣가에 걸린 닻과 쇠사슬을 발견하고 줄을 엮어보며 팔찌로 완성했다. 

그레이스켈리가 켈리백을 들고 있는 사진으로 이를 통해 켈리백이 유명해지게 됐다왼쪽 켈리백 사진온라인 커뮤니티 캡쳐 에르메스
그레이스 켈리가 켈리백을 들고 있는 사진으로 이를 통해 켈리백이 유명해지게 됐다(왼쪽), 켈리백. [사진=온라인 커뮤니티 캡처, 에르메스] 
 
“돈 있어도 아무나 못 사요” 부자들도 기다리게 하는 ‘에르메스 백’
에르메스는 ‘돈이 있어도 아무나 살 수 없는 가방’으로 유명하다. 프랑스 현지에서 한땀 한땀 수작업으로 제작되고, 연간 제조 물량이 한정적인 만큼 기본적으로 1~2년 대기는 기본이다. 기본 가방 모델은 1000만원대부터 시작하며 2억원을 호가하는 제품도 있다.
 
에르메스의 유명 가방인 ‘버킨백’은 모델이자 가수, 영화배우인 제인 버킨의 이름을 땄다. 1984년 버킨은 에르메스 켈리백을 들고 비행기를 탔는데 가방에 물건이 많아 바닥에 쏟아졌다. 당시 에르메스 경영자였던 장 루이 뒤마(Jean Louis Dumas Hermes)가 이후 버킨을 위해 수납이 잘 되는 실용적인 가방을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버킨백’이다. 

에르메스 ‘버킨백’와 ‘켈리백’, ‘콘스탄스백’ 등은 VIP 고객들만 주문 제작할 수 있다. 이를 구매하기 위해서는 매장에서 식기, 의류, 신발 등을 구입해 4000만원에서 1억원가량의 실적을 채워야 한다.
 
제인버킨이 에르메스 버킨백을 들고 있는 모습 사진온라인 캡쳐
제인버킨이 에르메스 버킨백을 들고 있는 모습. [사진=온라인 캡처]
 
화장품계 에르메스? ‘에르메스 화장품’···사업 영역 확장
에르메스는 가방 외에도 테이블웨어가 인기를 끌고 있다. 2020년 3월에는 183년 역사상 처음으로 뷰티 라인 '메띠에(M`etier)’를 론칭하며 화장품 사업에 뛰어들기도 했다.
 
에르메스가 ‘명품 중의 명품’으로 불리는 이유는 확실하다. 여전히 수공업을 유지하고 있는, 몇 안 되는 브랜드다. 45개 국가에서 300개 이상의 매장을 열었지만, 제작은 프랑스 내 52개 생산지에서만 이뤄진다.

"마케팅으로 소비자들을 현혹하지 않겠다"는 장인정신을 바탕으로 마케팅이나 영업 활동을 거의 하지 않는다. 타 브랜드에서 진행하는 ‘앰버서더’도 없는 것으로 유명하다.

우직하게 장인 정신으로 제품을 만드는 것이 에르메스의 전략이자 지금의 에르메스를 만드는 계기가 됐다. 덕분에 에르메스는 리셀가가 판매가보다 2~3배 높은 ‘가치 있는 브랜드’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거대 기업으로 편입돼 생산 방식도 중국 등 타국가로 바꾼 브랜드와 달리 창업주 직계후손에 의해 경영되고 있는 에르메스. ‘명품 중의 명품’으로 선망의 대상이 된 에르메스의 브랜드 가치가 지속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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