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혜숙 칼럼] 과학연구는 근육만들기…꾸준함이 '생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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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혜숙 교수
입력 2023-10-12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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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혜숙 교수
[임혜숙 교수]



오래전에 대학 입시를 위해 체력장을 준비해야 하던 시절, 체력장에 포함된 종목 중 여학생은 턱을 철봉 위쪽에 두고 30초간 매달려야 만점을 맞는 ‘팔굽혀 매달리기’라는 종목이 있었다. 처음 철봉에 매달려 보았을 때는 단 1초도 버티지 못하고 매달리자마자 떨어졌다. 본격적인 입시 준비가 시작되기 전부터 놀이 삼아 친구와 함께 거의 매일 점심시간에 철봉에 매달리는 연습을 했다. 만점을 맞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고 시작한 것은 아니었지만 꾸준히 노력한 결과 놀랍게도 친구도 나도 거뜬하게 30초를 버틸 수 있게 되었다. 이와 비슷한 일련의 경험들은 시간을 두고 성실하게 노력하기만 하면 많은 것을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해 주었고, 지금까지 내가 이루어낸 크고 작은 성취의 근간이 되어주고 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를 기술 패권 시대라 부른다. 군사력이 아닌 각 국가가 보유한 첨단 기술의 우위로 글로벌 패권이 결정된다는 의미로, 경제·외교·군사 전 분야에서 벌어지고 있는 미국과 중국 간 패권 경쟁의 핵심 또한 첨단 기술에 있다. 특히 인공지능, 반도체, 양자, 5G 기술처럼 민간과 군사 분야에 두루 활용되는 민·군 겸용 첨단 기술을 놓고 미·중이 첨예하게 경쟁하고 있으며 주도권을 갖는 쪽이 향후 경제패권과 군사패권을 모두 쥐게 될 것이다.
 
미·중 기술패권에 관하여 정리한 책 <기술의 충돌>(박현, 2022)에 따르면 2021년 6월 미국 상원을 통과한 바이든 행정부의 ‘혁신경쟁법안’에는 미국 첨단산업의 경쟁력 강화와 중국을 제재하기 위한 각종 방안이 담겨 있다. 미국의 과학기술 역량 강화와 산업 부흥을 통한 중국과 격차 유지, 대중국 제재 확대, 핵심 기술과 공급망별 동맹 규합 등이 그것이다. 이 법안은 2022년 7월 하원을 통과하면서 ‘반도체와 과학법’으로 이름이 바뀌었는데 첨단 기술 산업에 연방 예산 2800억 달러(약 365조원) 규모를 투입한다. 이 가운데 에너지·바이오·우주항공 등을 포함한 기초과학 연구개발과 인력 양성, 인프라 확충에 2000억 달러를 투입하고, 국립과학재단 산하에 기술혁신국을 신설하여 반도체·인공지능 등 10대 핵심 기술 연구개발에 집중적으로 투자한다. 세부 법안인 ‘반도체 지원법’에는 향후 5년간 미국에 반도체 제조 시설을 짓는 기업에 예산이 총 527억 달러(약 69조원) 지원될 것이지만 미국 정부의 보조금을 받는 기업은 10년간 중국 영토에서 반도체 시설을 신증설할 수 없다는 단서 조항이 달려 있다.
 
중국은 정부 주도의 광범위한 자원 동원과 첨단 기술에 대한 대규모 투자로 막강한 제조업 역량과 글로벌 공급망을 확보하고 있다. 특히 지난 30년간 지속된 미국 주도의 안정적인 글로벌 분업구조에서 비롯된 기회를 통하여 많은 혜택을 누리며 경제력과 군사력이 급성장하였다. 민·군 겸용으로 활용될 수 있는 첨단 기술의 급속한 발전을 이루어 미국의 경제패권, 나아가 군사패권까지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중국은 2021년 3월에 열린 중국 최대 정치행사인 양회에서 ‘14차 5개년 규획(2021~2025)’을 발표하였는데 인공지능, 양자컴퓨팅, 반도체, 뇌과학, 유전자·바이오, 우주심해탐사, 임상의학·헬스케어 등 7대 첨단 과학기술 분야에서 2035년까지 자립·자강하겠다는 목표를 밝혔다.
 
다행스럽게도 2020년대 대한민국은 반도체, 이차전지, 디스플레이를 비롯한 몇 개 첨단 기술 분야에서 미국과 중국이 무시하지 못할 카드를 쥐고 있다. 이는 정부가 지난 반세기 동안 꾸준하게 기초·응용과학, 기업의 연구개발에 투자해 온 덕분이라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전환할 수 있었고 그 파급효과를 거둬들인 결실이다. e-나라지표에 나타난 통계에 따르면 1998년 3조3000억원이었던 정부 연구개발 예산은 20년간 꾸준히 증가하여 2019년 20조원을 넘어섰고 올해 30조원을 넘었다. 정부 재정 지출 감축을 요구받았던 1998년 IMF 외환위기 상황에도 김대중 정부는 과학·공학 분야 인력 양성을 위한 ‘학문 후속 세대 양성 사업(BK21)’에 매년 2000억원 넘는 신규 예산을 투입했다. 정권이 바뀌어도, 2008년 국제 금융위기 상황에서도 대한민국 연구개발 예산은 예외 없이 매년 꾸준하게 증가했고 2000년대 이후에는 전체 예산 중 4% 이상으로 유지됐다.
 
지난 8월 말에 공개된 2024년도 예산안 분야별 재원 배분에 따르면 내년도 전체 정부 예산이 2.8% 증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올해 31조1000억원이었던 정부 연구개발 예산은 5조2000억원(16.6%) 감액된 25조9000억원으로 나타났다. 이는 전체 예산안 대비 3.9%에 불과하다. 교육·기타 부문 연구개발 예산 1조8000억원이 일반 재정 사업으로 재분류되어 정부 예산안에 반영되었다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측 설명을 고려하더라도 10.9%가 감액되었다. 보건·복지·고용(7.5% 증가), 일반·지방행정(0.8% 감소), 교육(6.9% 감소), 국방(4.5% 증가), 산업·중소기업·에너지(4.9% 증가), SOC(4.6% 증가), 농림·수산·식품(4.1% 증가), 공공질서·안전(6.1% 증가) 등을 포함하는 12개 분야 중 연구개발 예산이 가장 큰 폭으로 감소한 것이다.
 
국가 연구개발 예산 중 과학기술 분야 기초연구사업 역시 올해 2조6000억원에서 2000억원 감소한 2조4000억원 규모로 책정되었다. 기초연구사업 중 우수연구는 연구자 생애주기에 맞추어 신진·중견·리더 연구자 지원사업으로 정교하게 설계되어 연구자들에게 성장 사다리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기초연구사업 중 생애기본연구는 다양한 연구를 폭넓게 소액 지원하여 연구 기반을 확대하는 역할을 해왔다. 이번 예산 감액으로 1억원 미만 중소 규모 과제에 대한 신규 지원이 모두 사라질 것으로 보이며 그동안 어렵게 구축한 많은 연구자의 연구 기반이 흔들리고 기초연구 생태계가 파괴될 것이 우려된다.
 
정부가 과학기술인에게 어떤 메시지를 보내는지는 더 중요하다. 연구개발 예산 감축이라는 메시지에 더하여 ‘R&D 이권 카르텔’이라는 매도에 성실하게 일해 온 대한민국 대다수 연구자는 연구 중단에 대한 우려와 불안감을 느끼고 있다. 14년간 지속된 대학 등록금 동결로 인하여 물가 인상조차 반영하지 못하는 처우를 감내하며 묵묵히 연구에 집중해 온 대학 교수, 연구보조원을 구하기 어려워 실험과 온갖 잡무를 스스로 감당해야 했던 정부출연연구기관 연구자들로서는 매우 억울한 비난이 아닐 수 없다. 그간 정부 연구개발 예산 중 어떤 부분에서 카르텔적 비효율이 발생했는지 분석이 선행되지 않은 이러한 매도는 대한민국 전체 과학기술인의 자긍심에 상처를 입히는 일이다.
 
세계 주요 국가들은 첨단 기술 개발의 초경쟁 국면에 접어들었으며 국가 간 과학기술 장벽이 점점 더 높아지고 있다.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임기 시작부터 과학기술을 국정 운영의 중심에 두고 과학기술정책실(OSTP)의 전문성을 강화하고 과학적 근거에 대한 국민적 신뢰를 높이기 위한 정책에 집중했다. 바이든 대통령이 반도체 웨이퍼를 흔들며 한국 기업에 전략적 협력을 요청했던 사건은 역사의 한 장면으로 기록될 것이다. 첨단 반도체 공정에 필요한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를 생산하는 네덜란드의 ASML이나 첨단 반도체 위탁생산의 절대 강자인 대만의 TSMC와 같이 다른 나라들이 필요로 하는 핵심 기술을 보유한 국가만이 국제무대에서 다른 나라와 협력하거나 협상할 기회를 얻는다. 이러한 기술력은 기초·응용과학에 대한 정부의 장기적인 투자와 대학 및 정부출연연구기관과 기업의 연구소에서 이루어지는 지속적인 연구개발에서 비롯된다.
 
우리 몸의 근육은 골격과 함께 신체를 지탱하는 기둥으로 심장 등 여러 장기의 움직임을 담당하며 신체의 대사 균형을 잡아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꾸준히 단련하지 않으면 근육량이 쉽게 감소하고 근육이 쇠약해진다. 관리를 소홀히 하여 한번 약해진 근육을 되살리기 위해서는 훨씬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한다. 지난 반세기 동안 꾸준하고 성실하게 재원을 투입하여 단련해 온 우리나라 기초과학 근육과 고부가가치 산업 동력이 쇠약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연구개발 재원 투자와 더불어 과학기술에 대한 매력도를 높여 우수 인재들이 과학기술 분야에 유입되도록 해야 한다. 능력이 발휘될 수 있도록 좋은 연구 환경을 제공하고, 성과와 파급에 대한 인정과 보상이 적절히 이루어져 긍지와 보람을 느끼며 일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우리가 그렇게 지켜낸 과학기술 근육이 자원도 인구도 부족한 대한민국을 첨단 과학기술 강국으로 이끌어 우리 미래를 지켜줄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 주요 이력 

△이화여대 전자전기공학전공 교수 △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 △ 전 국가과학기술연구회 이사장 △ 제50대 대한전자공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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