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혜숙 칼럼] ​부모가 된다는 축복과 기쁨을 공감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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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혜숙 이화여대 전기전자공학 교수
입력 2023-06-29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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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혜숙 교수]

 
 
몇 달 전 학교 근처로 이사를 왔다. 거의 매일 밤 산책했던 정든 동네를 떠나기가 섭섭했지만, 막상 이사 오고 나니 출퇴근 시간이 많이 절약되어 좋다. 새로 이사한 곳에서 만난 반가운 풍경들이 있다. 젊은 부부가 아기를 유모차에 태우고 아파트 단지를 산책하거나, 아침 출근길에 젊은 아빠 혹은 엄마가 아기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주는 모습, 초저녁 무렵이나 휴일 낮 놀이터에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낭랑한 목소리, 엘리베이터나 아파트 공동현관에서 마주치는 초등학생들의 밝은 얼굴들이다.
 
나는 미국에서 박사과정을 시작하자마자 첫째 아이를 갖게 되었다. 입덧하면서 수업을 듣는 일도 쉽지 않았지만, 아기가 태어난 후 데이케어 센터에 아이를 맡기고 찾아가며 학업을 계속하는 일은 더욱 쉽지 않았다. 수업과 프로젝트, 논문연구를 모두 아이가 센터에서 돌봄을 받는 주 5일, 하루 8시간 동안에 수행해야 했다. 아이는 감기에 걸리거나 열이 나는 일이 잦았고 이런 때에는 데이케어 센터에 보낼 수 없어, 부부 중 한 명은 학교에 갈 수 없는 것이 큰 어려움이기도 했다.
 
아이의 조부모님이나 주변의 도움을 거의 받을 수 없는 환경 속 육아 중에도 학업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비결을 몇 개 꼽아본다면, 첫째로 공동양육자인 남편의 태도가 중요했던 것 같다. 아내의 학업도 자신의 학업만큼이나 중요하게 생각하고 육아 또한 자기 일로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담당해주었기에 가능했던 일이 아니었나 싶다. 믿고 맡길 만한 탁아기관이 있었다는 점도 주요했다. 학교 근처 교회에서 운영하는 기관으로 매우 저렴했지만, 안전한 환경에서 신뢰할 수 있는 교사들에 의하여 아이가 보호받고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있었기에 내게 주어진 시간만큼은 불안감 없이 학업에 집중할 수 있었다. 또한, 부부 모두 근무시간에 있어서 유연성이 큰 대학원생이었기에, 수업이나 프로젝트 미팅 시간과 같이 정해진 일정이 아닌 다른 일들은 상황에 맞추어 조정할 수 있었던 것이 크게 도움이 되었다. 둘째 아이는 부부가 모두 학위를 받고 취업을 한 상태에서 태어났기에, 가사와 육아에 도움을 줄 도우미를 고용하고 회사 가까이 위치한 센터에 보내면서 돌볼 수 있었다. 경제적으로 상당한 부담을 무릅쓰고 육아와 가사가 안정적으로 진행될 환경을 만든 것이 직장에서 인정받고 지금까지도 경력을 지속할 수 있었던 비결이다.
 
우리나라는 1980년대까지도 산아제한정책을 펼쳤다. ‘아들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나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라는 표어가 아직도 기억날 정도의 적극적인 산아제한정책에 힘입어 4인 가족이 마치 표준처럼 자리 잡게 되었고, 남아선호 현상도 거의 사라졌다. 통계청 홈페이지에서 찾은 2022년 ‘인구 동향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출생아 수는 대략 1970년 100만, 1980년 86만, 1990년 65만으로 급격히 감소하여 산아제한정책은 불과 20년 만에 큰 효과를 본 것을 알 수 있다.
 
출산 정책은 1990년을 기점으로 출산 장려로 급선회하였으나, 출생아 수는 2000년 64만, 2010년 47만, 2020년 27만으로 매우 빠르게 감소하고 있다. 2022년에 태어난 아기는 25만으로 1970년 출생아 수와 비교하여 4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 합계출산율은 ‘15세에서 49세에 속한 여성 1명이 가임기간 동안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평균 출생아 수’로 정의된다. 우리나라의 합계출산율은 1983년 인구수를 현상 유지하는 데 필요한 ‘인구대체수준’인 2.10 이하로 하락한 이후, 2022년 0.78까지 일관되게 전 세계 국가 중 가장 빠른 속도로 감소하고 있다. 합계출산율에 있어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 2004년 이후 계속 꼴찌를 유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합계출산율이 1.0 미만인 유일한 국가이다.
 
인구학자 조영태 교수의 저서에 따르면 합계출산율이 1.3 이하로 3년 이상 계속된 초저출산 현상이 발생하면 출산율이 다시 반등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뜻에서 ‘초저출산의 덫’이라는 단어로 표현한다고 한다. 초저출산의 덫에 걸린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와 비교하여 월등히 빠른 속도로 고령화가 진행되고 있다. 국가의 고령화 기간은 ‘60세 이상 인구가 전체인구의 10%로부터 20%가 되는 데 걸린 기간’으로 정의되는데, 이를 나라별로 비교하면 프랑스 145년, 영국 80년, 일본이 25년인 것에 반하여, 우리나라는 2000년에 10%에 진입한 후 2017년에 20%에 도달하여, 17년이라는 최단기간에 고령화되었다. 노동시장에서 이탈하는 고령자 인구보다 새롭게 노동시장에 유입되는 청년 인구가 매우 적으니, 노인에 대한 사회적 부양 부담이 급격히 증가하여 현재의 고령자를 위한 사회보장제도나 연금제도는 수년 내로 정상 작동이 불가능해질 것이다.
 
산아제한정책이 짧은 기간 큰 효과를 본 것에 반하여, 최근 30년간 추진되어온 출산장려정책의 효과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우리 사회의 고질적 문제인 부동산 거품과 과대한 사교육비 지출이라는 저출산의 주요 원인이기도 한 문제는 논외로 하고, 그간 저출산 대책으로 제안되었던 정책들에도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믿고 맡길 수 있는 보육 기관의 중요성은 그간에도 많이 강조되어 왔지만 여전히 충분치 않다. 아이를 국공립어린이집에 보내기 위해서는 아직도 신청 후 몇 개월 이상, 길게는 몇 년을 기다려야 한다니, 보육 시설을 믿고 아이를 낳기가 어렵다. 코로나 기간 중 보육 시설의 휴업 혹은 폐업에 따른 대응 방안이 없어 경력이 단절된 여성의 비율이 급격히 올라간 것도 보육 시설과 여성의 경력 지속, 더 나아가 출산율과의 밀접한 상관관계를 설명하는 것이리라.
 
일·생활의 균형을 이룰 수 있는 유연한 근무형태 및 근로시간, 근로환경이 제공되어야 육아 중에도 경력을 지속할 수 있다. 육아휴직 제도가 잘 정비되고 제도 활용률이 올라간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육아휴직 후 복귀했을 때 주요 업무에서 배제되거나, 원래 담당하던 업무가 아닌 다른 업무에 배치되어 결국은 경력단절로 이어지는 사례가 많지는 않은지 살펴보아야 한다. 또한, 공동양육자 중 한 사람이라도 근로시간이 불규칙하거나 절대적으로 긴 경우 안정적인 육아 환경이 되지 못한다.
 
인구집중으로 인해 청년들이 과도한 경쟁에 내몰리고 있는 서울특별시의 21년 합계출산율이 0.626인 것과 비교하여, 안정적인 일자리와 충분한 수의 국공립 보육 시설이 잘 정비된 세종특별자치시의 합계출산율은 특별시와 광역시를 모두 포함한 도시 중 유일하게 1을 넘어서 1.277인 것은 시사점이 크다. 출산장려정책은 주당 근로시간을 포함하는 고용정책, 지역 균형발전 정책 등을 종합적으로 함께 고려하여 세심하게 설계되어야 한다.
 
부모 역할에 대한 우리의 인식과 문화도 바뀌어야 한다. 좋은 집에서 비싼 사교육을 시키고, 충분한 경제적 지원을 해줄 능력이 있어야 좋은 부모인 것은 아니다. 아이에게 적절한 관심을 보이고 아이가 정서적으로 안정된 환경에서 자라날 수 있도록 돌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나의 예이지만 대부분의 미국 대학생들은 아르바이트나 시간제로 근로하면서 대학에 다니고, 졸업 후 취업하여 대출받은 등록금을 상환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여성이 가사와 육아를 전담하는 가부장적 문화나 근로시간의 길고 짧음으로 충성도를 평가하는 직장 문화도 바뀌어야 한다. 아이를 양육하는 부모에게도 적절한 휴식과 여가가 보장되어 지속 가능한 양육환경이 될 수 있도록 돕는 정책적 노력이 필요하다.
 
출산율을 올리는 일 못지않게 중요한 일은 이미 우리에게 찾아온 아이들을 또한 잘 돌보는 일이다. 가정폭력에 노출된 아이들을 조기에 파악하여 가해 양육자로부터 신속히 분리하고 보호하는 일, 질 좋은 아동양육시설이나 공동생활가정, 가정위탁시설 등을 통해 친부모가 아니더라도 우리 아이들이 좋은 환경에서 자라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22년 6월 아동복지법 시행령 개정을 통하여, 18세가 되면 자립 준비 수준과 무관하게 아동 양육시설을 퇴소해야 했던 것을, 보호 종료 아동 본인 의사에 따라 최대 25세까지 보호 기간을 연장할 수 있도록 한 것은 매우 바람직하다. 이에 더하여 자립할 준비와 자신감, 능력이 생길 때까지 멘토 혹은 후원자를 지정하여 필요한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이 또한 필요하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삶에서 그간 경험하지 못한 완전히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는 일이다.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존재가 되는 경험, 무조건적 신뢰와 사랑을 받는 경험, 자신보다 더 중요한 존재가 생기고, 일상에서 대면하는 많은 상황에 대한 판단 기준과 우선순위가 완전히 달라지는 경험, 자신을 희생해야만 하는 상황이 생기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경험을 하게 되는 일이다. 아이의 성장을 지켜보면서 걱정과 염려, 기쁨과 보람을 동시에 느끼는 경험을 또한 하게 되는 일이다. 이러한 경험의 의미와 가치는 물질적 보상이나 금전적 인센티브 같은 것들로는 교환될 수 없는 것들이다. 부모가 되는 의미에 공감하고 그 가치를 인정하는 문화가 만들어질 수 있는 방향으로의 정책변환이 절실하다.
 
 필자 주요 이력 

△이화여대 전자전기공학전공 교수 △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 △ 전 국가과학기술연구회 이사장 △ 제50대 대한전자공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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