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창선 칼럼] 길거리 공해 '정당현수막', 한국정치의 민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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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창선 시사평론가
입력 2023-07-18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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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창선 시사평론가
[유창선 시사평론가]



 
얼마 전 예술의전당에서 오케스트라 연주회를 관람하고는 감흥의 여운을 간직하며 건물 밖으로 나섰다. 즐겁고 아름다워진 마음으로 길을 건너려고 건널목에 섰는데 건너편에 걸려 있는 현수막 두 개가 눈에 들어왔다. 순간 연주회장에서 담고 나온 마음속 감흥이 일그러지는 느낌이었다.
위에 걸린 현수막은 국민의힘 국회의원 이름으로 만든 것인데, ‘코인투기 돈봉투 추악한 민주당 민낯’이라는 큰 글씨가 적혀 있었다. 그 바로 아래에 걸려 있는 현수막은 더불어민주당 지역위원장이 만든 것이었는데 ‘윤석열 정부 1년 무너진 경제, 추락한 국격’이라는 글자가 역시 큼지막하게 적혀 있었다. 이른바 ‘정당 현수막’들이다.
요즘은 정당이나 정치인들이 내건 이런 현수막들을 보면 누가 옳고 그른지를 가릴 의욕이 생겨나지 않는다. 그저 짜증 나고 피곤할 뿐이다. 그렇지 않아도 주말에 서울 도심에 나가면 양쪽의 극단 세력들이 벌이는 시위 때문에 짜증이 머리 꼭대기까지 나 있는 상태다. 한쪽에서는 ‘윤석열 정권 퇴진’을 외치고 다른 한쪽에서는 ‘이재명·문재인 구속’을 외치며 주말 도심 교통을 마비시킨다. 사회적 약자들의 절박한 요구가 있다면 다소 불편이 따르더라도 경청해야 한다는 정도의 생각은 갖고 살지만, 이런 무의미한 소음과 불편함을 무한한 인내를 발휘하며 견뎌야 할 이유는 찾기 어렵다. 그런 극단의 세력들이 외치는 목소리는 합리적이지도 상식적이지도 않은 그들만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술의전당 앞길만이 아니었다. 내가 사는 동네 건널목에도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의 정당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길을 건너려고 신호를 기다리다 보면 시선이 그리로 향할 수밖에 없으니 선택의 여지가 없이 눈에 들어온다. 그것을 알기에 다른 곳도 아닌 하필이면 건널목 신호등 옆에다 그런 현수막들을 내거는 것이다.
여야 정당들이 자기 지역 유권자들에게 주장하고 싶은 바가 있으면 물론 표현할 자유는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내용이 서로를 원색적으로 비방하는 네거티브 구호 일색이고, 현수막도 우후죽순처럼 곳곳에 수없이 내걸리고 있다는 점이다. 여야 어느 정당의 외골수 지지자가 아니라면 무시무시한 규탄의 내용을 담은 그런 구호들이 달가울 리 없다. 한국 정치를 이끄는 여야 정당이 내건 현수막들이 점점 거리의 공해가 되고 있는 현실이다. 국민들의 다른 행위들은 깨알같이 규제하는 나라에서 유독 정당만은 아무런 규제도 없이 자기들 마음대로 살벌한 현수막들을 거리에 마구 내걸어도 된다. 이런 법이 어디 있는가.
그런데 ‘이런 법’이 있다. 정당 현수막을 사전 신고나 허가 없이도 수량 제한 없이 15일간 마음대로 걸 수 있도록 하는 옥외광고물법 개정안이 더불어민주당 김민철·서영교·김남국 의원에 의해 발의되었고 이 법안은 지난해 5월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여 12월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당시 정부는 “규제를 받는 일반 사업자 현수막과 형평성, 정당 홍보물 난립, 주민 불편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며 우려를 표했지만 여야 의원들은 찬성 205표, 반대 9표, 기권 13표 등 압도적인 찬성으로 가결시켰다. 정부는 시행령을 통해 정당 명칭, 정당·설치업체 연락처, 표시 기간 등을 표시하도록 했지만 이 정도 장치로는 현수막의 무분별한 난립을 막을 수 없었다. 진흙탕 싸움에 익숙한 우리 정당들에 자율적인 절제를 기대하는 것은 애당초 무리였음이 드러난 지 오래다. 여야 정당들은 정국의 현안이 있을 때마다 서로를 비방하는 현수막들을 길거리 곳곳에 무차별적으로 내걸고 있다.
이에 지역 주민 불만과 원성이 높아지자 일부 지방자치단체에서 정당 현수막 강제 철거에 나섰다. 인천시는 전국 지자체 가운데서 처음으로 정당 현수막을 규제하는 내용이 담긴 조례 개정안을 지난달 8일 공포하고 계도기간을 거쳐 지난 12일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이 조례는 정당 현수막을 지정게시대에만 게시하고 그 개수를 국회의원 선거구별로 4개 이하만 허용하도록 했다. 그리고 현수막에 혐오·비방 내용을 담지 못하도록 했다. 행정안전부는 인천시의 개정 조례가 상위법에 위배된다며 법안을 의결한 인천시의회에 재의를 요구하도록 했지만 인천시가 거부하자 대법원에 해당 조례의 무효확인 소송과 함께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을 낸 상태다.
인천발 정당 현수막 철거는 다른 지자체로도 확산될 조짐이다. 광주시는 정당 현수막의 난립을 막기 위한 개정 조례안을 입법 예고하고 의회 의결을 거쳐 9월부터 시행할 계획이다. 울산시도 다음 달까지 정당 현수막만 전용으로 걸 수 있는 지정 게시대들을 별도로 설치하고 지정 게시대가 아닌 곳에 설치된 정당 현수막은 강제 철거하겠다고 밝혔다.
물론 상위법이 개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지자체들이 조례를 통해 법의 내용에 반하는 행동에 들어가는 것은 법적인 다툼을 피하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지자체들의 이런 행동은 법적 결론에 상관없이 주민 요구를 수용하여 불만을 해결하기 위한 정치적 결단의 성격이 강해 보인다.
정당 현수막을 둘러싼 갈등의 이면에는 현수막을 통해 이름을 알릴 수 있는 기성 정치인들의 기득권 또한 자리하고 있다. 현수막이 많이 내걸릴수록 기성 정치인들은 이름을 알리게 되고 정치 신인들은 내년 총선에서 그만큼 불리해지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입법의 책임을 지고 있는 국회가 수수방관하고 있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다. 자신들이 만든 법으로 인해 길거리 공해가 확산되고 주민 불만이 커져가고 있는데 시간만 끌고 있는 것은 옳지 않다. 개정된 옥외광고물법의 문제점이 백일하에 드러난 이상 국회는 이를 다시 바로잡는 데 주저하지 말아야 할 일이다. 자고 나면 정쟁에만 매달려 있는 여야 정당들이 정작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시간만 끌고 있는 모습은 납득하기 어렵다.
 
 
 
 필자 주요 이력 

▷연세대 대학원 사회학 박사 ▷전 경희대 사이버대학교 NGO학과 외래교수 ▷전 한림대 사회학과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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