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창선 칼럼] '킬러 문항' 논란, 교육은 가고 정치만 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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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창선 시사평론가
입력 2023-06-22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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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창선 시사평론가]




"(윤 대통령이) 학교 수업에서 다루지 않는 내용은 (수능) 출제에서 배제하라고 말씀하셨다." 지난 15일 이주호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 브리핑에서 전한 윤 대통령의 이 한마디로 이른바 ‘킬러 문항’을 둘러싼 논란이 확산되었다. 수능을 불과 150여 일 앞둔 시점에 대통령이 수능 출제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는 비판이 제기되자 대통령실은 혼선의 책임을 교육부 관료들에게 물었다.
바로 다음날 교육부 대입 담당 국장이 경질되었다. “‘공교육 과정에서 다루지 않은 분야에 대한 수능 출제를 배제하라’는 윤 대통령의 지침을 몇 달째 전혀 이행하지 않았다”는 것이 대통령실이 밝힌 문책 사유였다. 수능도 아니고 모의고사 문제 때문에 대입 담당 국장이 인사조치 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대통령실은 “강력한 이권 카르텔의 증거로 오늘 경질을 예의 주시할 필요가 있다”면서 ‘본보기’ 인사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이어 수능 출제를 담당하는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의 이규민 원장이 “6월 모의평가와 관련해 기관장으로 책임을 진다”면서 사임했다. 수능도 아니고 문제에 오류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단지 모의고사의 난이도 문제 때문에 평가원장이 사퇴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사퇴 과정에 ‘외압’은 전혀 없었다는 설명이지만, 이미 평가원에 대한 감사가 예고되었던 상황인지라 평가원장이 거취 문제에 압박을 느낄 만도 하게 되었다.
브리핑 혼선 등의 이유로 윤 대통령의 경고를 받은 것으로 알려진 이주호 부총리는 자신과 교육부의 책임임을 강조하며 사과를 했다. "대통령께서 이 문제를 여러 차례 지적했음에도 신속한 대책을 내놓지 못한 점에 대해 교육부 수장으로서 죄송하다"는 것이었다. 대통령의 발언이 혼선을 낳았다는 여론을 의식한듯, 이 부총리는 모든 것을 자신들의 책임으로 돌리려고 애쓰는 모습이었다.
윤 대통령은 단호했다. 킬러 문항에 대해 "수십만 명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부적절하고 불공정한 행태다", "약자인 우리 아이들을 가지고 장난치는 것"이라고 참모들 앞에서 비판했다고 한다. "교육당국과 사교육 산업의 카르텔"이라고도 했었다. ‘킬러 문항’의 배후로 ‘이권 카르텔’까지 지목했으니 대통령의 서슬퍼런 말은 관련 부처와 기관들을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교육당국, 출제기관, 입시학원, 이들 모두가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는 ‘이권 카르텔’의 당사자로 지목받게 될 분위기가 되었다. 윤 대통령은 대입 수능시험에서 공교육 교과과정 밖에서 출제되는 킬러 문항이 사교육 문제의 핵심인 것으로 판단하는 듯하다. 사교육에 대한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는 킬러 문항 배제를 ‘입시 개혁’의 출발점으로 삼으려는 것으로 보인다. 킬러 문항을 원천 배제하더라도 출제 기법을 고도화하고 정성을 기울이면 변별력이 확보된 '공정 수능'이 가능하다는 것이 대통령실 인식이라고 한다.
사교육에 대한 부담을 줄이는 방향으로 입시 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윤 대통령의 생각 자체에 이의를 제기할 이유는 없다. 그럼에도 수능을 5개월 앞둔 시점에 대통령이 출제의 가이드라인을 지시하는 모습에 박수를 보내기 어려운 이유는 차고 넘친다. 여권 내에서는 윤 대통령이 대학 입시 전문가라는 충성 발언들이 이어진다. “수십년 동안 검사 생활을 하면서 입시 비리 사건을 수도 없이 다뤄봤고, 특히 조국 일가의 대입 부정 사건을 수사 지휘하는 등 대입 제도의 누구보다 해박한 전문가이다.”(박대출 국민의힘 정책위의장) “저도 전문가지만 특히 입시에 대해서는 (윤 대통령이) 수사를 하면서 깊이 고민하고 연구도 하면서, 저도 진짜 많이 배우는 상황이다.” (이주호 부총리)
입시 비리 수사를 많이 했다고 ‘입시 전문가’라고 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 백번 양보해 설혹 대통령이 입시 전문가라 한들 출제의 구체적인 사항까지 지시하고 나서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우리의 입시제도가 안고 있는 구조적인 문제가 단지 대통령이 킬러 문항 배제를 지시하고 그것을 이행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초고난도의 킬러 문항들이 출제되지 않는다 해도 사교육이 줄어들 것으로 기대하는 전망들은 많지 않다. 입시가 어떤 식으로든 변별력을 갖기 위해서는 내신과 수시 경쟁이 치열해질 가능성이 커진다. 입시 경쟁이 존재하는 한 사교육은 그 지점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변별력이 떨어진 수능이라는 변화 앞에서 혼란스러워진 수험생들도 사교육을 끊을 가능성은 크지 않다. 무엇보다 출신 대학에 따라 평생이 좌우되는 우리 사회의 구조적 환경이 달라지지 않는 한 대입 경쟁의 열기는 식지않을 것이고, 사교육 시장이 크게 줄어들기도 쉽지 않아 보인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 지시 하나로 해결되기에는 너무도 복잡하게 얽히고 설켜있는 것이 우리의 입시제도이다. 그렇기에 시간이 걸리더라도 교육현장 안팎의 많은 의견들을 수렴하고 토론하면서 중지를 모아서 판단해야 하는 것이 입시정책이다. 설혹 대통령이 아무리 ‘입시 전문가’인들, 자신의 결론부터 제시하면서 출제의 가이드라인까지 개입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더욱 희한한 것은 킬러 문항 논란이 입시제도와 정책에 대한 토론이 아니라 진영 간의 정치적 대결로 전개되는 광경이다. 그동안 입시정책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던 사람들이 갑자기 뛰어들어 킬러 문항의 열렬한 반대자가 되기도 하고 옹호자가 되기도 한다. 애당초 입시정책의 내용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어느 것이 ‘우리 편’의 얘기인가에만 관심이 가 있는 사람들이다. 이러니 입시정책이 교육이 아니라 정치가 되고 만다는 우려를 떨칠 수가 없다.
‘일타 강사’를 때린다고 사교육이 근절된다면 입시 정책이 얼마나 간단한 일일까. 과도한 사교육 부담을 줄여야 한다는 데는 백번 동의하지만, 킬러 문항만 배제하면 사교육이 근절될 것처럼 말하는 주장들을 듣노라면 단견도 이런 단견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평소 수월성 교육을 주장하던 보수 쪽 사람들이 변별력이 약한 ‘쉬운 수능’으로 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돈 많이 버는 사람을 죄인으로 몰아서는 안 된다고 하던 사람들이 돈 많이 번다고 일타 강사들을 비난한다. 평준화 교육과 쉬운 수능을 주장하던 야당과 진보 쪽 사람들은 그런 여권 진영을 비난하고 있다. 뭐가 뭔지 모를 지경이다. 교육은 사라지고 정치만 남은 모습이다. 5개월 뒤면 수능을 치르는 수험생들이 또다시 실험 대상이 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입시 정책, 특히 출제 방향을 놓고 이렇게 떠들썩하고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이는 것은 수험생들과 학부모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필자 주요 이력 

▷연세대 대학원 사회학 박사 ▷전 경희대 사이버대학교 NGO학과 외래교수 ▷전 한림대 사회학과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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