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균 칼럼] 피해자에게 가혹하고 가해자에게 관대한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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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균 명지대 경영정보학과 명예교수
입력 2023-03-11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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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균 명지대 경영정보학과 명예교수]



정순신 변호사 아들의 학폭 사태 여진이 계속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의 불씨가 되었던 ‘정유라 학사 비리’를 능가할 수 있는 권력형 학폭으로 분류될 수 있을 만하다. 아들은 지속적인 언어폭력으로 피해학생을 괴롭히면서 아버지가 “아는 사람이 많다”고 자랑했고 학폭에 대한 처벌에는 아버지의 치밀한 설계에 따라 대응하여 서울대 합격에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강제전학을 최대한 지연시키기 위해 동원된 각종 행정절차와 재판과정은 ‘재판의 기술’로 불리면서 ‘학폭 전문’ 변호사들 사이에서 이미 매뉴얼처럼 통용되고 있다는 사실도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피해자는 극단적 선택까지 시도할 정도로 고통에 시달리다가 대학에 진학조차 하지 못한 것으로 드러나면서 국민의 공분을 샀다. 윤석열 대통령의 지시로 교육부가 예고한 학폭 근절 대책이 미봉책에 그친다면 오히려 ‘학폭으로 대학 가는 법’이 매뉴얼로 만들어져 권력형 학폭이 일반화할 우려마저 있다.
오늘날 학교폭력뿐만 아니라 직장폭력, 군대폭력, 가정폭력, 성폭력, 데이트폭력 등 각종 폭력이 이제는 한국 사회가 운명적으로 안고 가야 하는 사회현상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러운 지경이 되었다. 이들 다양한 폭력범죄는 K드라마 소재로 이용되어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를 통해 전 세계로 방영되고 있다. 군대폭력을 사실적으로 다룬 드라마 ‘D.P.’,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과 언어폭력을 다루고 있는 드라마 ‘나의 아저씨’와 ‘미생’, 정순신 변호사 아들 사건으로 더 유명해진 공상 학폭 드라마 ‘더 글로리’, 촉법소년제도를 악용하는 소년범죄자들을 섬뜩하게 그린 드라마 ‘촉법소년’, 가벼운 처벌밖에 받지 않은 범죄자들에 사사로운 복수를 하는 공상 드라마 ‘모범택시’ 등 셀 수 없이 많다. 이들 드라마는 ‘참교육’ 메시지를 전하면서 피해자에 대한 미흡한 정신적 보상의 문제를 비판적으로 그리고 있다. 이원석 검찰총장이 희대의 성폭행범 정명석 목사에 대한 수사를 향해 예고한 “엄정한 형벌”은 사실 정명석에게만 적용될 것이 아니다. 한국과 미국의 형량의 엄청난 차이는 범죄자의 아버지가 아들을 고소하고 한국에서 처벌받도록 탄원서를 제출하는 상황까지 낳았다. 아동·청소년 성 착취물을 판매해 얻은 범죄수익을 은닉한 아들의 송환을 미국이 범죄인 인도협정에 따라 요구하자 아버지가 “미국에서는 자금세탁과 음란물 소지죄만 해도 (징역) 50년”이라는 탄원서와 함께 아들을 직접 검찰에 고소·고발한 사례가 있다.
법경제학에서 범죄행위는 비용편익이론으로 설명된다. 합리적인 범죄자는 범죄행위를 통해 자신이 얻을 수 있는 편익을 범죄가 발각되어 감당해야 하는 처벌비용과 비교해서 비용보다 편익이 클 경우 범죄를 저지른다. 예상처벌비용은 실제처벌비용과 범죄가 발각되어 처벌받게 될 확률에 의해 결정된다. 처벌확률을 0에 가깝게 낮출 수 있다면 예상처벌비용 또한 0에 가까울 것이기 때문에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은 커진다. 범죄를 줄이려면 예상편익을 초과하는 예상비용이 발생하도록 법과 제도를 설계해야 한다. ‘재판의 기술’을 활용할 수 있는 ‘부모 찬스’가 사라진다면 처벌확률은 크게 높아져 학폭의 예상비용을 높일 것이다. ‘전관예우’의 관행을 종식시키고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공직자 윤리로서 제도화할 수 있다면 ‘부모 찬스’를 크게 줄일 수 있을 것이다. 학폭 가해자의 예상처벌비용을 높이는 다른 방법은 실제처벌비용을 강화하는 것이다. 가령 물질적 피해보상을 소득과 재산에 비례해서 높이거나 학폭 가해자의 공직 취업을 제한하는 것도 방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정순신 변호사 아들 사례처럼 학폭 전력을 쉽게 지울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다면 학폭은 크게 증가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학폭 피해자가 입는 피해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중첩적이다. 가해자에게 직접 받는 피해는 1차 피해이다. 학폭범죄가 발생하면 각종 2차 가해가 가해진다. 학교 책임자는 인사상의 불이익을 두려워 사건을 일단 은폐하는 데 주력한다. 피해학생과 가해학생의 분리라는 가장 시급한 조치도 쉽지 않다. 교사는 중재를 빌미로 가해학생 부모를 피해학생 가정으로 안내하기도 한다. 피해학생의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치유하기 위한 노력은 오롯이 피해학생과 그 가족에게 맡겨지고 학교와 사회는 가해자의 장래에 누가 되지 않도록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피해자는 도망 다니고 가해자가 쫓아다닌다. ‘맞은 사람은 다리 뻗고 자지만 때린 놈은 잠 못잔다’는 옛말은 문자 그대로 옛말이 되었다. 이제 마지막 남은 법적 절차에서 부모의 권력지위마저 개입되면 피해학생에게는 대형 3차 가해가 기다리고 있다. ‘재판의 기술’을 동원하면 가해자의 ‘인권’은 국가가 나서서 꼼꼼히 보호하는 사이에 피해자의 인권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스스로에게 맡겨진다. 가해자 측은 ‘개선장군’이 되고 피해자와 그 가족은 ‘억장’이 무너진다. 가해자의 장래를 위해서 피해자의 장래가 희생되어서는 최소한의 사법정의마저 세워질 수 없다.
고통 분담으로 공동체의 역량 결집에 긍정적으로 작용하던 온정주의가 이제는 공동체의 해체를 넘어 공동체의 소멸을 재촉하고 있다. 피해자의 양보에 기초하는 가해자에 대한 인간적 배려가 피해자에 대한 능욕과 가해자의 특권으로 고착되면서 한국 사회를 계급사회에서 신분사회로 퇴화시키고 있다. 사유재산뿐만 아니라 공권력마저 사유화를 넘어 세습하는 봉건사회로 뒷걸음질치고 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는 헌법 제1조 제①항은 허울만 남고 “사회적 특수계급의 제도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어떠한 형태로도 이를 창설할 수 없다”(헌법 제11조 제②항)는 조항을 무색하게 만드는 ‘수저론’이 국민의 공감을 얻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피해자 중심주의를 확립하려면 궁극적으로 선출되지 않는 시험권력의 사유화를 차단해야 한다. 그것이 공수처와 같은 또 다른 권력기관을 신설해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은 모든 국민이 체험하고 있는 바이다. 검찰과 사법부의 ‘전관예우’를 근절하고 한국 사회의 신분사회화 경향을 차단하려면 사법권력의 정당성을 최종적으로 확인해주는 주체가 국민이어야 한다. “개인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맹세만이 아니라 “국민에게만 충성한다”는 덧붙임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제 한국 사회에서 민주주의와 역동적인 시장경제가 부활하려면 사법기관에도 국민에 의한 직접적인 감시와 통제가 가능하도록 유권자에 의한 직접선출제도를 도입하는 방안이 강구되어야 할 것이다.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경제학과 ▷독일 브레멘대 경제학 박사 ▷명지대 경영정보학과 교수 ▷경실련 경제정의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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